H.N. 소. 우. 주. 지기의 세상 삐딱하게 보기
'의심'의 사전적 정의는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어느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로 '믿음'이 있습니다. '의심'은 그 정반대에 있는 마음이라 할 수 있고요
'믿음'에게서는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면, '의심'은 그냥 부정적인 것부터 떠오르죠. '믿음'을 생각하면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피어난다면, '의심'은 찡그린 미간부터 연상되지요. 그만큼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이미지는 이렇지만 실질적으로는 '의심'과 '믿음'이 서로 견제하며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삶이 조금은 나아질 수 있도록 각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요
개인적으로 경험한 거지만 치열한 노력을 하지 않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믿음'보다는 '의심'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더군요. 방치를 심각하게 봐야 할 이유는 시간이 갈수록 '의심'의 자리가 더욱더 커진다는 거였습니다. 게다가 저 같은 경우는 '의심'으로 인한 습관까지 생겼고, 여전히 고치지 못하고 있죠. 그만큼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걸 부인하지 못하겠네요. "고치자"라고 마음먹고 노력을 한다고 하는데도 아쉽게도 아직까지 바꾸지 못하고 있어요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다름 아닌 '의심'이 '불신'으로 자라기 쉽다는 거죠. 일단 시작되면 주변인들과 관계에 대한 불신, 자신에 대한 불신이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나더군요.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요. '의심'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발아해서 '불신'이라는 나무로 자라는데, 스스로가 부지불식간에 물과 양분까지 계속 주고 있지 뭡니까
묘목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감히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의심'도 처음에는 조절이 가능하지만 방치하고 지내다 보니 아예 제어가 힘들어지게 되더군요. 심하면 노예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그렇기에 늘 스스로를 돌아보며 주의를 기울여야만 간신히 균형된 삶을 살 수가 있죠
또 다른 문제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일상생활에서 '의심'을 당하게 될 경우 느끼게 되는 부정적 감정이 꽤 강하다는 거였죠. 다른 어떤 경우보다 기분을 더 상하게 한다는 겁니다. 심각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정도로요. 당연히 오랜 기간 쌓은 신뢰와 믿음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고요
"오해 아니야?" "사정이 있겠지"라고 하며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정리된다면 그것만큼 다행인 것도 없겠죠. 다만 그렇지 않을 경우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다는 느낌까지 줘서 심각한 내상을 입히기에 정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행동이란 겁니다
마음에 작은 '의심'의 꼬투리가 생기면 시간이 지나며 잠잠해지는 게 아니라 자가증식을 통해 폭발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곤 합니다. 너무 바쁘거나 다른 큰 일에 정신이 팔려 생각할 겨를이 없으면 모를까. 일단 속도가 붙으면 제어는 불가능하니까 제 때에 진정시키지 않으면 곤욕을 치르게 되죠
믿고 살아도 부족한 인생을 불신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경험하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그런데요. 살아 보니까 그렇지 않은 상황과도 종종 맞닥뜨리게 되더라고요
다들 경험해 보셨겠지만 '의심'이 늘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게 아니더라고요. 반대로 '믿음'이나 '선의의 마음'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었고요
'믿음'과 '선의의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뒤통수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한 번만 다시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살다 보니 그게 쉽지가 않더군요. 좋은 마음으로 믿다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손해도 여러 번 봤죠. 경제적 손해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었지만 상처받은 마음이 아무는 데는 시간이 꽤 많이 필요했죠. 이따금씩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받은 고통은 또 어떻고요. 정말 최악은 관계가 박살 난다는 거였죠. 더구나 이런 이유로 망가진 관계의 복구는 꿈도 못 꾸게 되더군요. 타격감도 엄청나게 커서 회복되는 데에 상상을 뛰어넘는 노력을 해야 했고요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눈을 씻고 찾아보니 '의심'의 좋은 점도 보이더군요
처음엔 여전히 꺼림칙해서 편하지 않더군요. 오래된 습성이 무섭더라고요. 다행히 노력하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색안경을 벗고 '의심'을 대할 수 있었지만요. 고비를 넘기는 데까지가 힘들었지 색안경을 벗고 나니 실체가 제대로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의심'이 제게 준 도움을 생각나는 데로 정리해 봤습니다
우선 돌다리도 두들겨 볼 수 있는 신중함을 주었죠. '의심' 덕분에 실수를 여러 번 줄였더라고요. 시행착오를 줄이니 뭐를 하든 좋은 평가를 받는 빈도가 늘어났고 덩달아 자존감도 점점 올라갔죠
덤으로 신중 덕분에 뒤통수 맞을 뻔한 위기도 잘 벗어났었고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일상의 모든 일에서 불편함이나 어색함이 느껴졌을 때 '의심'을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며 지냈을 텐데 "왜 이대로 해야 해?"라는 마음을 갖게 되니 좀 더 나은 걸 찾게 되었죠. 물론 항상 성공하진 않았어도 무언가 개선해 나간다는 게 저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어주더군요. 자긍심이 커지니 저 자신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죠
게다가 자기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면서 "나만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덕분에 더 자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어제보다 손톱 밑의 뭐 만큼이라도 나은 오늘을 살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의심' 속에 사는 것보다야 믿으며 사는 게 좋겠죠. 하지만 삶 속에서 '언제나'는 존재하지 않기에 늘 균형 잡힌 마음으로 살려고 지금도 노력 중입니다
'비판적 낙관주의자' 또는 '낙천적 비관주의자'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