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했던 고민이 이별을 위한 준비였다는 걸 이제라도 깨달았어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했던 게 불과 얼마 전 일 같은데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의 장기기증서약은 좀 의외였어요. 정말 뜬금없는 메일 한 통에서 시작됐으니까요. 우연이 인연이 된 경우라고 할까요. 아무튼 기막힌 타이밍들이 겹치면서 제 생애 최고의 결정을 내리게 된 거니까요.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선택을요
2005년 1월로 기억해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게는 선물 같은 날이었죠
평소와 같이 메일을 확인하는데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라는 곳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와있었어요. 생각지도 않았던 정말 뜬금없는 것이어서 내용을 확인하고는 그냥 삭제해 버렸죠.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로 계속 '장기기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는 거예요. 엄청 신경 쓰이더군요. 그러다 보니 어느 날은 상상까지 하더라고요. 그런데 내용이... 장기기증을 위한 수술실의 모습을 제삼자가 되어 보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겁이 많이 났었죠. 시간이 지난 후에는 왜곡된 공상이란 걸 알았지만 당시에는 '장기기증'이 엄두도 나지 않았죠
시간이 지나니 '장기기증'에 대해서도 잊게 되더군요. 그렇게 2달 정도가 지났는데, 또다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메일이 왔어요. 겨우 잠잠해졌던 고민이 다시 시작되었죠. 며칠을 계속 고민했어요. 처음 메일을 받았을 때보다 고민의 강도가 훨씬 더 커졌죠. 남의 일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갑자기'내 문제'가 되었으니까요. 상황이 완전히 바뀐 거죠.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어요. 그냥 별생각 없이 결정할 수도 있었지만, 약속을 하든 외면을 하든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어요. 더 힘들었던 이유는 한쪽에서는 '그래! 해보자'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자' 며 심하게 방해했거든요. 머릿속에서 계속 논쟁을 벌였죠. 한 달이 넘어가면서 많이 지쳤던 걸로 기억해요. 그러다 보니 굳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었고요
충분히 심사숙고를 하고서 드디어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생각하고 난 후였어요. 그때까지 마음고생을 해서인지 속이 다 후련하더군요
그렇게 저는 '장기기증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등록을 하고 며칠이 지나자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물론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온 거였죠. '장기기증'에 대한 인쇄물과 스티커가 동봉되어 있었어요. 필요한 곳에 붙이라고 보낸 것들인데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이내 결정을 내릴 수 있었죠. 운전면허증과 늘 가지고 다니던 다이어리에 부착했어요.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뭐랄까요... 자긍심 같은 게 느껴지더군요. 아무튼 기분이 엄청 좋았었죠
'장기기증' 등록을 한 이후로도 평범한 제 일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었는데 사무실에서 급하게 연락이 와서 서둘러 집을 나서야 했죠. 급하다고 해서 준비도 대충 하고서 운전을 하고 있었어요. 당연히 마음도 많이 급했겠죠. 그러다 사달이 나고 말았어요. 무슨 정신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쓸데없이 신호 위반을 해버렸죠. 그리고 때마침 바로 그곳에 교통경찰이 단속을 하고 있었고요. 절묘한 타이밍에 당황스러웠고 또 난감했죠. 그런데 어쩌겠어요. 위반을 했으니 그에 따른 벌칙을 받아야죠. 제게 운전면허증 제출을 요구하더군요. 당연히 별생각 없이 교통경찰관에게 운전면허증을 건넸어요. 어김없이 딱지를 끊더군요. 기분은 좀 나빴지만 -당연히 제가 잘못한 거지만 마음이 그렇더군요- 마음이 급해서 곧장 출발하려는데 교통경찰관이 갑자기 제게 말을 걸더군요
"장기기증 직접 신청하신 거예요?"
"예"
"좋은 일 하시네요. 조심해서 운전하세요" 라며 저에게 미소 지으며 목례를 하고 돌아갔죠
당황스럽더군요. '이건 뭐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다 그냥 웃음이 났어요. 갑자기 뿌듯한 마음이 들더군요. 상식적으로 방금 전에 딱지를 끊어서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반대로 기분이 엄청 좋아졌었죠. 그때 알았어요. '장기기증'을 하기로 한 결정이 제 인생 최고의 현명한 선택 중 하나라는 걸요
그래서 결심을 했었죠. 이렇게 좋은 기분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게 해 주자고요. 이런 좋은 걸 혼자만 아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요. 그래서 당시 다니던 회사 내부망에 '장기기증'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올렸어요. 회사 전체를 대상으로 한 건 아니고 제가 속해 있던 부서 동료들에게만 알렸었죠. 일단 해보고 반응이 괜찮으면 전사 내부망에 올려야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가지고요. 그런데 반응이 없었어요. 무플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겠네요
솔직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당연한 결과더라고요. 저 역시도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경험이 기억났거든요. 빠른 반응을 바란 제가 욕심이 과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죠. 다른 사람들이 반응을 안 하는 게 아니고 고민하는 중이라면서요
그래서 시차를 두고 다시 한번 제 개인적인 경험을 내부망에 올렸어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반응이 전혀 없더군요. 이번에는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일도 아니었기에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지금보다 더 진득하게 접근할 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더군요. 지금이야 사회적으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요. 또 반응을 하지 않는 동료들에 대해서도 제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해서 성급한 욕심은 내려놓게 됐죠. 그런데도 아주 천천히 그렇지만 집요하게 설득해 보자는 저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를 했거든요. 결국 제 생각을 그곳에서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게 됐죠
그 이후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살다 보니 생존과 상관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하고 살았었어요. '장기기증'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요
그러다 중간중간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역시도 관심을 갖지 않더군요.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차츰 주눅이 들면서 '장기기증'에 대해 말하는 걸 꺼리게 돼버렸죠
그런데 살다 보니 '장기기증'에 대해 얘기해야 할 때가 생기더군요. 특히 운전면허 갱신할 때는 필수적이었죠. 운전면허증을 보면 한 구석에 작게 표시가 되어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인식을 못할 수도 있지만 저는 작은 '장기기증' 표시를 볼 때마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까지였다는 거죠. 스스로 만족하고 자긍심을 느끼는 거... 거기까지
자기만족만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장기기증'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또 찾아왔어요. 어느 날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이벤트를 한다는 메일을 받게 되었죠. 내용을 확인하는데 마음에 쏙 들기도 했고 어렵지도 않아 저 역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미션을 수행하고 결과를 사진으로 남겨 릴레이 형식으로 올려놓는 것이었는데, 성취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더라고요. 그리고 그때 마스코트 '리보니'도 받았죠. 작은 가방에 부착하고 다녔는데 의외로 큰 역할을 해줬어요. 늘 가까운 곳에 두고 자주 보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수시로 생각하게 만들어 주더라고요.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크고 긍정적인 영향을 줬죠
그 이벤트를 계기로 오랜 시간 잊고 아니 밖으로 꺼내 놓지 않고 지냈던 마음을 바꾸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움츠러들어 나 혼자만 알고 만족하고 지냈었는데 이젠 용기 내 보자고요. 이젠 '그럼 좀 어때. 그럴 수 있지. 소개하는 게 창피하거나 잘못된 건 아니잖아'라고 마음을 바꿨어요. 앞으로는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상황과 여건이 되는 선에서 저의 역할을 만들어 보려고요. 물론 권한다기보다는 알려주는 역할이지만요. 특히 상대가 강요로 받아들이지 않게 세심하게 접근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작은 바람이 생기네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한 번이라도 '장기기증'에 대해 생각해 보는 분이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요. 그러면 그걸로도 저는 행복할 것 같습니다
'장기기증' 서약이 제게는 여러 면에서 중요하고 좋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제가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었죠. 특히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요
그리고 제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을 많이 바꿔줬죠. 죽음이 그냥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려움도 많이 줄어들더군요. 대신 정말 잘 살아서 마지막을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기대하도록 만들어 주었죠
'장기기증'에 대한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다음에 할 게 또 떠오릅니다. 그 일을 저지르고 나면 다시 글로 남겨야겠어요
*표제의 그림 "이 이미지는 챗GPT를 이용해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