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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도착한 섬, 제주

낯선 땅 제주에서 서서히 "살아진다"는 것에 대하여

by 해피걸

타이틀: 타임머신을 타고 도착한 섬, 제주

부제:낯선 땅 제주에서 서서히 “살아진다”는 것에 대하여

14년 전, 나는 낯선 대정읍에 서 있었다

14년 전(2025년 기준), 제주 영어교육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은 정말 텅 빈 땅이었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았고, 인터넷도 제대로 깔려 있지 않았던 곳, 그리고 주소에 "구억리 산몇 번지"라고 적혀 있던 곳. 내 눈앞의 풍경은 한적한 시골 같았고, 몇 동 되지 않는 3층 높이의 콘도 같은 아파트들이 전부였다.


처음으로 대정읍에 외출을 하던 날, 마치 내가 1990년대 초반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순간이동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숨이 막혔다.
‘젊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무언가를 꿈꾸고 싶어도, 펼칠 공간이 없는 것만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과연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당시 대정읍은 제주 안에서도 유서 깊은 동네였다.
유지들도 많았고,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마을이었지만, 정작 개발은 더뎠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가 다시 영국으로, 그리고 다시 제주도로 온 나는, 그 모든 것이 낯설고 버거웠다.


그리움은 결국 ‘사람’에서 시작됐다.

외지인으로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일부러 제주 토박이들이 모이는 자리에도 용기 내어 발을 들였다. 전업전업주부였고, 다섯 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었기에
하루 중 유일한 일탈은 독서모임에 참석하거나, 조심스럽게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이었다.


고요한 그곳에서도, 조금씩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한 번은, 몇 번 마주치며 웃던 얼굴이 어느 날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분이 스스로 생을 놓았다는 소식에, 며칠을 멍하게 보냈다.
전혀 내색하지 않던 분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그때 처음 알았다.
이곳은 생각보다 외로운 섬일 수도 있다는 걸.


욕을 먹은 날, 진짜 제주가 시작되었다

모슬포시장에 야채를 사러 갔던 어느 날이었다.
진열된 채소가 너무 시들해 보여, 조심스럽게 “조금 더 싱싱한 걸로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제주어와 함께 거친 말을 퍼부었다.


“왜 저한테 욕하세요?”
당황스러움과 억울함에 울컥했고, 그날 이후 한동안 시장을 가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지인들조차 그 시장을 피하고 있다는 걸.
거친 말이 익숙지 않은 외지인들에겐, 그것이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 삶의 울타리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선 외지인이었고,
그들도 나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좋아했고, 그래서 계속 독서모임에 나갔다. 함께 책을 읽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과 마음의 속도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제주에서 평생 목회를 해온 목사님께 조심스럽게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해야 제주 분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그분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냥 타임머신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간 거라고 생각해 봐.”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웃음이 났다.
그래, 나는 100년 전의 느린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투박했지만 평화롭던 그 시절

처음 제주 토박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었을 때, 놀랄 만큼 싸고 넉넉하게 차려진 밥상에 감탄했다. 단 반찬이 굉장히 나에게 짜게 느껴졌었던 기억이 있다. 일본여행에서도 느꼈던 것처럼
섬이라는 공간이 가진 보존의 방식 때문일까?
짠맛은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 좋아지기까지 했다.


물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럴 땐 늘 목사님의 말을 떠올렸다.
“이건 100년 전이야.”


그 한마디면,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이해보단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한 방식이 있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제주영어교육도시

시간이 흘러, 제주 영어교육도시는 제법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국제학교들이 들어섰고, 주민들과 학생들의 수가 늘어났고 커뮤니티도 생겨났다.
도로는 넓어졌고, 카페와 레스토랑, 병원도 들어섰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안전감’이었다.


예전엔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아도 괜찮았고, 문을 열고 자도 큰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특히 아파트공사가 많아지면서 국내외로부터 외지인의 유입이 많아졌고,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들도 종종 들려온다.


물론 누구를 탓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투박하지만 고요했던 공동체의 그 평온함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햇살을 먹으며 제주가 그립지만, 이제는 더 서울을 그린다.
영국은 지금 이스트홀리데이 기간이다. 기나긴 6개월 동안의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4월이 되자 조금씩 물러가고,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살이 눈앞에 펼쳐진다. 물론 여전히 아침저녁으로는 난방을 켜야 할 만큼 싸늘하지만, 낮의 햇살만큼은 마음을 열게 만든다.


어제는 하루 종일 햇살을 마음껏 들이켰다. 한 시간을 걷고, 30분을 벤치에 앉아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제주도가 아니라 서울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최소한 햇살이라도 실컷 누릴 수 있겠지?”


물론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꿈은 꿀 수 있다고 믿는다. 혹시라도 지극히 높으신 분이 내 열망을 들으시고, 그 바람을 들어주실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조용히, 그러나 진심으로 입 밖에 내어본다.
“서울에서 살고 싶어요. 그러면 안 될까요? 인간이 늙으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잖아요? 안 될까요?”


엊그제는 콜드플레이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정말 가고 싶었다. 정말 보고 싶었다.
아무리 지금이 인터넷 시대고, 영상으로 모든 걸 감상할 수 있다고 해도, 그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은 결코 화면 속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내가 제주에 살던 시절, 친구들은 종종 말했다.
“제주에서 살아서 좋겠다.”
나는 늘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바꿀래? 나는 서울에서 살고 싶은데.”


오늘 같은 날이면, 협재해변 앞에 사는 지인 가족은 찬란한 제주 바다 위에서 카약을 타고 있겠지. 그들을 비롯해 제주 영어교육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일상처럼 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문화는 다르다.


뮤지컬, 연극, 전시, 공연… 이곳 영어교육도시에서 그런 문화예술을 만나려면, 차로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
내가 아는 20대 비혼 여성은 직장에서 휴가를 내고 서울로 떠나곤 했다. 어쩌면 수도 없이 오갔던 서울에 지쳐, 어느 순간엔 동남아시아로 방향을 틀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박으로도, 혹은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2박 3일의 휴가를 내어, 홍대와 대학로, 클럽과 공연장을 누비곤 했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제주로 돌아왔다. 그녀에게도 제주도는 분명히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문화적으로는 아쉬운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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