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습작생의 밥벌이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알베르 카뮈는 기자로 활동했다. 조지 오웰은 경찰관이었다가 작가로서 명성을 떨친 뒤에도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로맹 가리는 마흔일곱 살까지 소설가와 외교관을 겸했다.
2022년 11월 말 소설 쓰기와 병행 가능한 일거리를 찾기로 결정한 뒤 나는 수일간 업에 대해 고민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다.
학부 시절 내 적성과 능력에 따라 생을 걸기로 택했던 직업은 소설가였다.
나는 내가 소설 쓰기를 택한 이유를 돌이켜 생각했다. 첫째로 타인의 주체적인 삶을 도모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둘째는 재미였다.
내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나는 일과 나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설을 쓰기로 택한 이유 두 가지는 고스란히 일자리를 구할 때의 요건으로도 작용했다.
기준을 세운 뒤로는 구직 사이트에 게시된 공고들을 훑어봤다. 내게는 습작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급여를 적게 받더라도 노동시간을 줄여야 했다. 주 5일 근무를 배제하고 나니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숱한 일자리 중 내게 맞는 일을 찾는 건 이상적인 연인을 찾는 것에 비견됐다.
두 달에 걸쳐 구직 사이트를 톺아보며 열 개 남짓한 지원 서류를 제출했다. 네 곳에서 면접을 봤다. 그중 하나가 경기도 소재의 독서 토론 학원이었다.
학원 면접이 있던 날 나는 검은색 니트 위에 회색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면접 예정 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지하철은 십 분 만에 서울 밖으로 빠져나갔다.
학원은 용인 수지구에 있었다. 지하철역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 한산한 대로에서 달리는 차들이 보였다. 대로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 외벽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출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서울에서 애용하는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카페가 있었다. 개발 정도가 비슷한 다른 지역들에 견주어 깨끗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학원장은 동화로 등단한 이력이 있는 중년 남자였다. 옷차림이 말끔하고 말씨가 차분했다. 면접을 진행하며 알게 된 바로 학원장의 아내 또한 동화로 등단한 작가였다. 나와 학원장 내외는 같은 대학교 출신이었다. 전공은 각각 광고홍보학, 회계학 그리고 아동복지학으로 내 복수전공 학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창작과 무관했다.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내 앞에 앉아있는 고용주가 긴말 없이도 내 처지를 이해해 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할까.
원장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 글쓰기를 가르치는 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작금까지 글을 쓰는 지인들만 고용하다가 이례적으로 온라인 공고를 올렸는데 마침 소설을 쓴다는 지원자가 눈에 띄어 연락했다는 부연 설명을 덧붙이면서.
서로의 필요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면접이 있기 며칠 전 나는 학원 블로그를 찾아 원장이 써놓은 글을 읽었다. 블로그 포스팅에는 글쓰기와 토론 교육의 효용성을 숙고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와 더불어 마음을 끌었던 점은 원장이 피력한 자신의 인생관이었다. 원장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아타락시아를 목적으로 두고 안온한 삶을 꾀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결이 맞는 사람이 꾸려놓은 일자리에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면접 다음 날 오전 합격 문자를 받았다. 침대에 누워 잠이 덜 깬 채 문자를 확인한 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켜 인수인계 일정에 맞추어 시간을 비워놓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전기 철학을 집대성한 『논리-철학 논고』를 집필한 후 작은 마을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쳤다. 교편을 잡은 경험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합격 문자를 받고서 반나절 동안은 고양감에 젖어 있었다. 아이들의 인격 성장과 지식 배양을 돕는다는 자긍심, 사유를 확장할 계기가 마련됐다는 만족감 그리고 습작 기반을 다졌다는 성취감이 한 데 섞였다.
2015년 3월 광고 수업을 듣던 나는 2023년 2월부터 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며 소설 습작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