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뒤 날이 갰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연둣빛 이파리들이 돋아났다. 땅을 뚫고 선 풀들은 발목 높이까지 자랐다.
지난 수업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4학년 반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다고 말했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 적고 ‘자’ 자와 ‘존’ 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런 뒤에 아이들 한 명 한 명 차례로 눈을 맞추며 스스로를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 여기느냐 물었다.
다행이기로 모두가 그렇다고 말했다. 여론을 의식해 마음에 없는 답을 한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명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새겨졌을 말의 힘을 믿는다.
강의를 마치고 수업 일지를 썼다. 자존감을 일러 준 대목에서 대학교 신입생 때의 일을 떠올렸다.
생각나는 대로 거침없이 지껄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교양 수업 시간에 발표할 차례가 된 나는 강단에 서서 뒷일을 가늠하지 않고 가정사 등 폐부를 드러내놓았다.
그런 모습을 기꺼이 본 동기 한 명이 있었다. 그와는 이전까지 사적 교류가 없었다. 그는 언질 없이 내게 다가와 자존감이 높아 보인다며 비결을 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고하건대 그때까지의 나는 자존감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았다. 더욱이 내 자존감이 높은지 어떤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누구를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다마는, 스물한 살의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동기에게 장점 열 가지를 적어 오라고 말했다.
수일 후 동기는 열 개의 장점을 적어 가지고 왔다. 나는 그것들을 읽은 뒤 다음 만남 전까지 단점 열 가지를 적어 오라고 말했다.
다시 며칠이 지나고 동기는 단점 열 가지를 적은 목록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단점을 적기가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어찌어찌 두 번의 회담을 마친 동기는 술자리를 즐기지 않던 내게 몇 없는 친한 동기가 됐다.
수개월 후 동기는 친구 한 명을 소개해주었다. 수업이 끝난 뒤 동기의 친구와 나는 불이 반쯤 꺼진 학생식당 안에서 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자존감 고민을 갖고 있던 차에 동기로부터 내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같은 수순을 밟았다.
몇 년 후 기록을 나눴던 두 사람에 지인 한 명을 더하여 대부도로 당일치기 여행을 갔다. 누가 제안한 여행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서로를 모르던 네 사람은 바닷바람을 피해 들어간 식당에 모여 앉아 칼국수를 먹었다. 날이 추웠고 해변에는 사람보다 갈매기가 더 많았다.
퇴근길에 대로변을 걸으면서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을 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가로수 이파리들이 흔들렸다.
지난 3월 타계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한 에세이에서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미세하게 떨리는 이파리들을 보며 감상에 젖었던 자신의 유년을 회고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바람이 불지 않을 때에도 초록 잎들을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작은 것들 앞에서 몇 분이고 멈춰 서 있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