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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준영 Jan 04. 2023

얼어붙은 강물 위에 다시 쌓인 눈

 작가 A는 최근 전시를 마쳤다.

이번 전시를 전후해서 의사 결정과 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유난히 느려진 것 같아 A는 당황해하고 있다.

아마도 전시 이후에 으레 찾아오는 허무함 때문인 듯하다.


 오전부터 진행된 전시 철수를 마치고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았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한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여 느껴지는 근육통에

친구에게는 한바탕 넋두리를 쏟아내었다.


 최근에 떨어진 전시공모가 있어서 제출한 포트폴리오를 찾으러 갔다. 포트폴리오를 한번 만드는 데에도 출력비용이나 기타 비용까지 합치면 4-5만 원은 족히 쓰게 되니 반출가능이라고 하면 아무리 떨어진 공모라도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낫다. 게다가 만드는데 쏟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 있으면 꼭 응모하겠습니다.”   


몸은 이미 출입문을 향해 움직거리며 누가 봐도 기계적인 웃음을 지으며 (기계적으로 보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자연스러움을 좇는)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하고 나온다.


“사람이 맞으면 피를 흘린다... 사람이 맞으면 피를 흘린다... 사람이 맞으면 피를 흘린다...”

떨어졌던 공모에 사용하려 했었던 전시제목을 중얼거리며 운전대를 잡는다.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허무함은 무엇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섬세한 관찰력을 무디게 만든다. 그 허무가 있기에 섬세함이 존재하고 창작의 근거가 되지만 가끔은(최근에는 종종) 부지불식간에 암전 상태가 되고는 한다.-


 최근에 지원했던 공모와 관련해서 면접을 보러 지하철을 타고 간다.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한파에 머릿속까지 얼어 버린 것 같았지만 딱히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두 정거장 후에 15년 전에 대입 때문에 살았던 동네를 지나가는 것을 알았을 때  최근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사람이 떠올랐다.


-노란색 브리지가 듬성듬성 들어간 머리카락, 옅은 갈색이 들어간 무테안경, 색이 바래서 동색인지 헷갈리는 커다란 로고가 박혀있는 황금색 패딩 점퍼, 검은색 테슬 로퍼 그리고 롤 업 된 갈색 코르덴 바지. 패딩 점퍼와 어울리는 적당히 낡은 검은색 직물 백팩.-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나는 무심한 척 핸드폰을 보며 재빠르게 오늘 날짜를 확인하였다. 그때의 기억은 다분히 15년 전 노량진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였고 지금 수산시장을 지나치고 있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그 남자를 다시 떠올린다.  


  지하철이 수산시장을 지나쳐 예전에 다녔던 입시학원을 지나고 있을 때 즈음 반대편 출입구 쪽에서 승객 두 명이 시비가 붙더니 이내 격한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싸움은 꽤 격렬한 양상을 보였지만 지하철 안의 대부분의 싸움이 공공장소라는 특성 하에 쉽게 소강상태로 접어들기 마련이기에 딱히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누가 먼저 쉽게 폭력을 휘두르지 못했고 '개새끼', '죽는다', '맞는다' 등의 세 가지 표현의 단조로운 바리에이션에 지루함을 느낄 때쯤 지하철은 한강철교에 진입하였다.


  오전의 눈부신 햇살에 강물이 이상 할 정도로 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강물은 한파에 빈틈없이 얼어있었고 그 위에 다시 하얀 눈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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