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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말 Jan 09. 2023

가스라이팅 1부

주체 없이 흘러가는 삶



 혼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박상연 씨는 지난해 6월 같은 상가 의류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조은혜 씨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이번 달부터 의류매장에서 일하게 됐다며 천성이 그러한 듯 말수가 적은 상연에게 친절한 웃음을 건네고 있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로 착각할 만큼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서도 자주 커피숍에 와서 상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커피를 안 마시는데 커피숍에 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가 상연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연도 조금씩 그녀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상연은 물 같은 사람이다. 편안하고 잔잔하게 사람들과의 선을 지키면서 허락되는 만큼만 흘러야 할 곳으로 흘러간다. 그런 상연의 마음에는 흐르지 못한 오래된 댐이 하나 있었다. 그 댐의 이름은 연인이다. 상연은 10년 동안 여자친구가 없었다. 커피숍에서 새벽부터 로스팅을 하고, 밤 9시에 마감을 하다보니 사람을 만날 틈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의 틈이 없는 걸까? 아니면 공간의 틈이 없는 걸까? 상연은 상대방이 마음을 열어주는 만큼만 흘러갈 수 있는 물 같은 사람이었다. 댐의 수문을 열 수 있는 키는 항상 상대방이 쥐고 있었다.


 상연은 나는 동갑이다. 가게 한 쪽을 장식하고 있는 상연이 그린 그림 속에 '1984'라는 익숙한 숫자를 보고 84년생인지 물어봤다. 나도 취미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서 우리는 그림을 주제로 자주 대화했다. 은혜 씨를 만나기 두 달 전, 상연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카페 단골손님인 작가님이 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의 소개로 상품디자인 일을 하는 세연 씨를 만났다고 했다. 물론 소개라는 게 어디까지나 커피숍 필터커피 패키지 디자인을 상담하기 위해서였지만 상연의 목적은 그것만이 아닌 듯했다. 평소에 상연이 세연 씨를 언급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키도 크고 보이쉬하면서 임청하를 닮았다고 했다. 예쁜 얼굴이라고 말하면 속내가 드러날까 봐 애써 그 말은 하지 않는 상연이었지만 상기된 표정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연 씨 마음에 봄이 왔구나'


 나와 작가님은 상연과 세연 씨가 커피숍 필터커피 패키지 디자인을 상담하는 자리에 같이 초대받았다. 상연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패키지 디자인은 더 이상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세연 씨는 상연의 표현대로 보이시한 숏단발이 잘 어울렸고, 또렷한 이목구비가 예쁜 얼굴을 중성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눈빛에 생기가 살아났다. 나는 서먹한 분위기를 깨고자 먹고 살만할 적에 끄적였던 그림을 보여줬다. 작가님과 세연 씨는 내 그림에 관심을 보이며 그림을 계속 그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명암을 표현하는 기법을 알려주고 내가 그리는 그림에 맞는 종이의 두께와 질감을 찾는 방법을 설명해 줬다. 묘하게 분위기가 상연이 소외되는 쪽으로 흘러가서 나는 패키지 디자인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상연과 세연씨여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상연을 보는 세연 씨의 눈빛에서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단 하나의 가벼운 호감표현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상연이 잘 알고 있었다. 흘러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렇게 상연은 마음을 접었다. 안타까웠다. 표현하지 못한 마음. 그 틈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상연에게는 없었다. 그저 열려 있는 곳으로만 흘러갈 뿐이었다.


 은혜 씨는 무용을 전공해서 자세가 바르고 우아했다. 꼿꼿하게 서 있는 허리가 날씬한 그녀의 라인을 강조했고 키가 실제보다 크게 보였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웃음이 많고 표정이 풍부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을 만큼 사회성이 좋았다. 상연이 그녀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청한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틈이 많았다. 시간이 없어서 여자를 못 만나겠다던 상연의 말이 떠올라서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두 번째 데이트에서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 상연은 나에게 은혜 씨가 이혼 경험이 있다는 사실과 두 사람이 동거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물어보지도 않은 동거 이유를 30분째 늘어놓는 상연을 보니 스스로도 이 동거가 께름칙한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 보기보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이구나'


 이혼이 뭐 별거냐고 딸린애만 없으면 상관없지 라는 내 말에 상연은 용기를 내는 눈치였다.10년 동안 외로웠을 그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때 내가 한 말을 후회하고 있다. 내 말이 두 사람 사이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살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급류 위에 띄워진 종이배처럼 아슬아슬 위태로운 흐름을 같이 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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