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방 온도 13도

설날이 며칠 지나 우리 집을 다녀간 J와 나눴던 얘기를 적어 본다. 아내와 함께 셋이 점심 식사를 하면서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해 봤다. 청순한 여고생 교복을 입은 하얀 피부를 지닌 소녀의 모습이 사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기억 속의 사진첩에 그대로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세 살 아래인 여동생과 같이 가방을 들고 느티나무 언덕길을 따라 걸어가던 일이 엊그제 같기만 하다. 엄마는 두 딸을 위해서 온갖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했다. 여러 가지 장사도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두 딸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그런 엄마의 삶 속에서  엄격함과 인내심 그리고 절약하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됐다. 

*J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쯤 이사를 가게 되어 만남이 거의 없었다.

얘기를 하는 중에 손에 든 손수건이 계속 코로 가는 것을 봤다. 

"아니 J. 감기 든 것 아니오?"

"네, 요즘 날씨가 춥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생각이 아니라 아직 겨울입니다." 아내가 묻는다.

"난방 온도를 몇 도로 해놨는데요?"

"네, 13도에 맞춰놨습니다."

"13도라고요. 우리 집은 20도로 맞춰놔도 추워요."

하루는 누가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문을 여니 도시깨스 직원이 찾아왔답니다. 깨스를 너무 쓰지 않았기에 사람이 사는지 빈 집인지 확인하려고 방문했다는 것이다.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말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됨은 어쩐 일인가?

J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유치원에서 어린이 교육을 위해 교사와 원장으로 수고하였다. 두 자매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언니가 당연히 먼저 결혼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동생이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다. 고생한 엄마의 짐을 덜어드린 것이 마음에 들어 좋았다. 향학열에 불타는 둘째는 영문학을 전공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 강의도 나가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J는 엄마를 모시고 지냈다. 엄마만 의지하고 살다 보니 J는 어린 아이다. 결혼할 생각은 아예 접었으니 피할 수 없는 싱글이다. 전적으로 의지의 대상이던 엄마가 2 년 전에 별세했다. 하늘나라로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며 수목장으로 모신 승화원에 한 달 동안을 매일 찾으면서 애통해하는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엄마를 생각해서일까? 난방 온도를 13도에 맞춰놓고  밤을 지새운다. 얘기를 듣기만 해도 춥다. 13도면 냉방이다. 내복은 물론 겉옷까지 껴입고 이불을 감싸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아무리 몸에 밴 절약이라도 감기에 걸리고 몸이 상하면 더 손해가 아닌가? 참을 걸 참아야지. 하지만 이해를 하고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일을 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수입이 없다. 겨울을 피해 잠시 우리 집 빈방으로 오라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남에게 부담이 되는 걸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니 허공에 흩어지는 메아리일 따름이다. 배운 대로 그냥 추위와 싸우며 인내심을 단련하고 몸에 익힌 절약정신으로 견디기에는 너무 혹독한 겨울이다. 어떤 가정은 온도를 높여 반팔 차림으로 생활한다고 하니 가난과 여유로움의 차이가 너무 깊다. 행정도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공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차라리 작은 아파트가 없었더라면 난방비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단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