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더 빡세게 해 보자고 시작한 러닝 운동, 송파구에 있는 올림픽공원은 넓은 면적에 코스도 다양해서 각 잡고 뛸 때마다 방문하는 매우 좋아하는 장소이다. 토성의 해자길을 따라 열심히 뛰던 어느 날,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 벤치에 한 고양이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천천히 다가갔다.
자세히 가서 보니 고등어 색을 띠며 갓 성묘가 된 거 같은 아담한 고양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를 보니 중성화하여 끝을 살짝 잘라놓았다. 사람과 친한 길냥이라 생각하여 인사를 한번 해보았다.
나 : HI!
고양이 : 야옹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고양이가 대답하듯 소리를 낸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더 인사해 보았다.
나 : Hello!
고양이 : 야옹
나 : Good evening!
고양이 : 야옹
이쯤 되면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의식한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상위 1% 개냥이라고 생각이 돼서 옆에 걸터앉았는데 놀라는 기색도 전혀 없다.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자 알아서 머리를 내 앞으로 숙이며 머리를 쓰다듬기 좋은 각도로 만들어준다. 이렇게 집사가 되는 것인가.
운동은 뒷전이고 영묘한 고양이와 서로 알아듣지 못할 대화를 나누고 이름을 붙여주기로 하였다. 윤기 나는 고둥이 털이 귀족 같아 보여서 ‘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 : 루이!
루이 : 냥냥
그다음부터 루이를 찾아서 일주일에 최소 두세 번 이상은 올림픽공원을 찾았다. 그냥 가면 루이가 섭섭할 테니 당근마켓에서 츄르를 싸게 사서 몇 개씩 가져가서 먹였다.
공원에 가서 루이의 영역에 들어가면 대부분 벤치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토성 뒤쪽 수풀에 있는데 그때 ‘루이’라고 외치면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냥냥’ 거리면서 온다.
이렇게 처음 본 사람한테도 붙임성이 좋으니 루이는 이 공원에서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루이는 내가 부르는 이름이고 루이는 팬이 늘어날 때마다 동시에 자기 이름도 늘어난다.
“명랑이” , “유미” , “얌미” , “보리”
내가 들어본 루이의 또 다른 이름만 최소 6~7개였는데 다 기억나지 않고 특히 들어본 이름들이 이렇다. 내가 평소 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주변에서 알게 되자 루이는 암컷이라며 여자 이름으로 부르라고 핀잔을 준다.
루이를 돌보는 어머님들의 발걸음이 특히 잦았고 어린아이들도 루이를 보기 위해 밤낮으로 공원을 찾는다. 그들은 루이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서 사료뿐 아니라 좋은 영양제와 물까지 싸들고 찾아온다. 대부분의 길냥이는 이렇게 전해준 음식을 먹고 바로 도망가지만 우리의 루이는 확실한 팬 서비스를 해준다. 더 친한 일부 팬 들한테는 똑똑한 강아지들이 많이 하는 앞발을 내미는 동작까지 한다. 똑똑한 루이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면 본인의 생계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풍족하게 조공을 받다 보니 루이 곁에는 그녀를 따르는 고양이 무리들이 있다. 토성 안쪽에 잔디밭을 들어가면 고양이들의 회의실이 나오는데 루이를 중심으로 길냥이들이 마치 업무회의 하듯 빙 둘러앉아있다. 말과 글로 의사를 전달하지 못해도 그 분위기를 통해 리더가 정해진다는 것을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역시 계급사회는 어디든 존재한다.
루이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면서 루이를 내 집에 데려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평소 혼자 사는 좁은 집에서 고양이를 한 마리만 둘 경우 많이 외로워하고 힘들어한다고 하였다. 고양이가 아무리 독립적인 동물이라지만 아까도 봤듯이 엄연히 무리를 구성하고 연대감을 공유하는 습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루이를 입양하려면 그 주변의 추종자를 전부 데려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집에서 고양이들을 침대에 재우고 나는 골판지 박스 위에서 자야 할 판이다. 내가 사는 곳 주변에 고양이들을 가둬 놓고 키울 곳을 계속 알아봤지만 각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평소 넓은 집에 대한 욕심은 없었는데 처음으로 정원이 있거나 방이 여러 개가 있는 큰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잠깐이라도 허락 되면 공원에 들러 루이를 보러 가는 일도 점차 잦아지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당근마켓 동네생활 글에 루이로 보이는 고양이가 사라졌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사는 곳과 외모를 확인해 보니 틀림없이 루이가 맞았다. 이런 날벼락이 있나…. 바로 게시글에 댓글을 달고 확인해 본 결과 그 루이가 맞았다. 루이를 평소에 “명랑이” 로 부르는 루이와 아주 친한 분이었다. 그 다음날 빨리 일을 처리하고 점심에 시간을 내서 공원을 찾아갔다. 루이라고 몇 번을 불러봤는데 루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데려간 건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인지 루이가 평소에 잘 있던 벤치에 앉아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데 한 두 분씩 루이가 거처하던 수풀 지역으로 와서 깊숙이 들어가 루이의 존재를 찾는다. 저분들도 아마 당근 게시글을 보고 찾아온 듯하였다.
그저 나의 주변을 스쳐 지나간 길냥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의외로 마상이 심했다. 애완동물과 관련된 용품점을 지나갈 때면 들어가서 고양이집을 보며 ‘루이가 저 정도 케이지 안에 들어가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유튜브에는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는 영상을 찾아서 보았다. 나의 유튜브 영상 추천은 금세 고양이와 관련된 콘텐츠로 가득 찼다. 처음으로 원룸에 사는 나 자신을 탓했다. 돈을 좀 더 써서 1.5룸이나 투룸으로 이사 갈걸 하는 후회까지 하였다.
올림픽공원에 갈 때면 수풀이 우거진 지역을 볼 때마다 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수풀을 파해치고 들어가 본다. 가끔 내가 수풀을 해 집는 것을 보고 공원 경비직원이 뭐 하는 짓이냐고 물어본다. 이상할 정도로 똑똑하고 귀여웠던 우리 모두의 고양이 루이의 행방을 아직도 찾는다. 루이는 그래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제발 그렇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