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에도 감사하겠습니다
“드르륵 드르륵”
21년 초 여름으로 접어드는 어느 날 새벽, 휴대폰의 알람 소리에 순간 눈을 떴다. 나는 이 알람소리는 한참 자는 중에도 인식이 가능하다. 왜냐면 바로 은행 어플 입금 알람소리이기 때문이다.
05:08 김XX
입금 - 20,000,000 원
내가 잘못 본 건가 하고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이천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업무 폰으로 바로 문자가 와서 확인하니 거래 중인 건설사 현장 소장님이 긴급 발주 물량이라고 제품 리스트를 보내준다. 문자 내용도 다 확인하기 전 전화가 왔다. 소장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현장소장 : 대리님 내가 돈도 먼저 보내고 물량표도 보냈거든요. 오늘 7시까지 망원동 현장으로 넣어주세요.
나 : 소장님 제 계좌 어떻게 아시고 넣으신 거예요?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7시까지 들어가요. 재고도 구하기 힘들고 만약에 정말 빨리해도 오후 당착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주하는 게 어딨어요. 제가 돈 들고 튀면 어떡하실라고요. 이러면 안 되죠.
현장소장 : 아 XX 내가 지금 당신하고 말장난할 시간이 없다니까. 지게차 하고 일하는 애들 다 와있으니까 무조건 구해서 현장으로 보내세요!
빵구는 본인이 내놓고 나한테 욕 한 사발 시원하게 내뱉은 뒤 소장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새벽 5 시쯤 갑자기 돈도 받고 욕도 먹었다. 그래도 선입금 넣어준 게 어딘가. 조금 기다렸다가 아침잠이 없으신 거래처 사장님들과 실장님들께 연락을 돌렸다. 자재 대란 때문에 재고를 확인하기가 매우 힘들었고 6~7 곳 정도 연락을 돌린 뒤 에야 겨우 재고를 맞출 수 있었다.
거래처실장 : 이렇게 발주하면 안 돼~ 재고 힘든 거도 잘 알 거고 배차도 얼마나 힘든데 지금~
나 : 감사합니다. 실장님 일단 제가 대충 정리해서 바로 선입금 넣어 드리겠습니다.
거래처실장 : 돈 빨리 넣어줘요. 배차 잡을게요 ~ 단가는 잘 알죠? 명세서 팩스로 넣을게요.
온 힘을 쏟아서 발주를 처리한 뒤 아침을 먹었다. 배차 정보가 나와서 바로 소장에게 전달했고 이후 소장에게 환불해 줄 돈과 내가 정산받을 이익금을 계산해 보니 회사를 다닐 때 받던 월급에 거의 반이었다. 돈을 이렇게 쉽게 벌어도 되나? 약간의 불안감과 흐뭇함이 감돌던 그때 물건을 받은 현장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현장소장 : 대리님 진짜 죄송해요. 어제 XX철강에서 물건 받기로 했는데 갑자기 재고 없다고 배 째라지 뭐야.... 미치는 줄 알았네. 진짜 고마워요~ 앞으로 내가 대리님한테 부탁할게. 미안해요.
나 :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새벽에 발주서를 보내도 좋고 욕을 엄청 퍼부어도 좋다. 선입금만 충실하게 보내주면 뭐든지 오케이. 코로나 시기, 제로금리에 돈이 엄청나게 풀리는 상황에서 건설 수요가 폭발했고 동시에 건설자재 가격은 폭등에 폭등을 거듭하였다. 특히 건물 기본 구조를 올리는데 쓰이는 골조 자재들은 그야말로 슈퍼사이클을 맞았고 앉아서 돈 번다는 말이 실감될 정도로 21년도의 상반기는 화끈함 그 자체였다.
돈이 풀리는 마당에 부동산과 주식도 동반 상승랠리를 맞았고 코스피는 3000포인트를 가볍게 돌파하였다. 어느 누구는 전염병 창궐에 이은 불황으로 나락을 가고 또 다른 누구는 자산가격의 폭등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던 2021년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운이 좋았던 때가 있었던가. 어차피 강남 아파트야 예전부터 쳐다도 못 볼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고 자재 매출과 주식으로 인해 불어난 나의 통장과 주식 잔고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휴대폰 어플을 보면서 조용히 웃음 짓게 할 정도로 뜨거운 계절을 보내게 하였다.
다른 자재를 취급하는 지인 또는 거래처들도 함박웃음을 짓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서로 시황을 알고자 하는 명목으로 만난 회식, 나까마 (공장이나 창고 없이 사무실만 놓고 중개 영업) 사장님부터 유통 담당자까지 몇몇은 시계와 차도 바꿨다고 하고 다들 자신감이 넘쳤다. 팔에 진하게 문신을 넣은 아는 동생은 연예인들이 받는 피티 받는다며 벌크 업된 팔뚝을 보여준다. 또 다른 형님은 비트코인으로 아파트도 사겠다고 하면서 어플을 보여주는데 부루마블 게임인 줄 알았다. 그냥저냥 하는 시황일 때는 누가 술값을 내는지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자기들이 내겠다고 하면서 색깔도 예쁜 신용카드를 저마다 내민다.
아까 전 문신한 친구의 여자친구가 근처에 있다고 곧 결혼도 할 거라고 인사도 시킬 겸 연락해서 그 친구들과 함께 온다. 살짝 성형한 티는 났지만 매력 있는 그녀와 친구들은 딱히 패션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비싸 보이는 옷과 장신구로 장식하였다. 우리 보고 잘 나가는 형님들이라고 그 친구가 소개하니까 그분들이 바로 우리 보고 오빠라고 한다.
문신 친구 및 그 무리들과 헤어지고나서 다른 형님이 좋은데 소개해준다고 해서 2차를 갔더니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접대하면서 대화도 하는 양주를 파는 술집이었다. 형님은 이런데 많이 와보셨는지 술과 안주도 잘 시키면서 종업원들과 잘 어울렸고 내 옆에도 연예인을 해도 될 것 같은 예쁜 여자가 옆에 와서 살갑게 인사하며 접대하였다.
종업원 : 오빠도 XX오빠하고 친구예요?
나 : 아뇨. 친구 아니고 형님인데요.
종업원 : 이런데 처음이에요?
나 : 처음은 아닌데 자주 오는건 아니에요.
종업원 : 그렇구나~ 와주셔서 감사해요. 편하게 마셔요.
여기서 일하는 분들도 대부분 주식을 하였다. 시간을 보니 미국주식이 열릴 때였다. 테슬라, 애플, 아마존, 마소 등등 ….. 뉴욕 증권시장에서 1만 킬로 넘게 떨어진 서울 압구정동 어느 술집에서 다들 서로 수익률을 자랑하며 웃고 떠들고 있다. 여기서 일하시는 몇몇 분들 종목 분석하는 걸 들어보니 상당히 수준급이다. 날카롭게 쏟아지는 그녀들의 종목 분석에 몇 가지 분석들은 휴대폰 메모를 켜고 적기까지 하였다. 이분들은 어디서 이렇게 주식공부를 하셨을까? 아무튼 모두가 행복한 21년 여름 속에서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조차 약간의 현타조차도 오지가 않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도 연신 어플을 켰다 껐다 하면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렇게 솟구치는 고점이 언제까지 갈 수는 없고 그 끝은 깊은 골짜기라는 사실을.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도 살짝 부리고 사고 나지 않을 정도의 약간의 허세도 부리면서도 그 뒤로는 갑자기 시장에 타격이 와도 대응할 수 있게 대비책을 마련해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오르는 시장에서 매도 버튼을 누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고 내가 결심을 굳히기 전 시장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건자재 모임 친구들도 나름 리스크 관리는 했지만 매번 볼 때마다 나타나는 내면의 침울한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업 앤 다운이 너무 크다 보니 우울증이 왔다는 친구도 있었다. 나도 계속 쪼그라드는 주식 잔고를 보면서 생기는 상실감을 다스릴 겸 무엇을 해볼까 하다가 내가 영업하면서 걸어 다니던 길을 틈틈이 다시 걸어보았다.
예전에 처음 이 일을 할 때에는 건설 현장도 방문하고 현장 인근 지역도 임장 할 겸 많이도 걸어 다녔다. 예전에 대중교통으로 거래처 현장을 다니면서 동네 작은 산과 산책길도 운동 삼아 짬짬이 다녔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진을 많이 찍어놓은걸 별 생각 없이 컴퓨터 하드에 옮겨 담았었는데 용량이 꽤 상당했다. 그것들을 모은 뒤 카테고리 별로 정리해서 블로그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서울이 지하철과 버스 시스템이 잘되어 있어서 그런지 특히 서울에 있는 길이 많았다. 그래서 블로그 이름도 ‘서울길’이라 하였다.
무료로 사용 가능한 디자인 플랫폼에서 로고와 스킨도 어렵지 않게 금방 만들었다. 한바탕 열광적인 축제가 끝나고 다시 평범 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게 큰 도움이 되었다. 타일을 판매하는 친구가 퇴근하고 꼼장어 먹으러 가자고 한다. 이 글을 마저 쓰고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