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 종로로 가는 길, 직진을 해도 되지만 약속 시간까지 꽤 여유가 있어서 일부러 무교동의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걸어간다. 밤이 다가오면서 노포에는 술 손님을 맞아 불을 낭창하게 켜 놓고 있고 종로의 직장인들은 삼삼오오 술자리를 찾아 퇴근길의 소란을 북돋운다. 물길 소리를 들으며 청계천을 가로질러 도착한 술집, 거기서 오늘 보기로 한 거래처 담당자와 술잔을 기울일 것이다.
부장 : 아이고 우리 사장님 오셨네~
과장 : 안녕하세요. 사장님
내가 전에 분명히 ‘차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전달했을 텐데 거래처 사람들은 연신 나보고 ‘대표님’ , ‘사장님’ 소리를 한다. 비싼 술집 가자고 해놓고서는 돈은 나보고 내라는 건지, 아무튼 연신 손사례를 치면서 아니라는 추임새와 함께 테이블을 다시 보니 누군가가 한 명 더 있다.
사원 : 안녕하세요 차장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이번에 입사한 ‘XXX’입니다.
이번에 거래처 팀에 신규 직원이 충원 됐는가 보다. 반갑게 인사하고 명함을 주고받는데 왠지 느낌에 손이 살짝 떨리는 느낌도 난다.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보니 신입사원에게는 이 자리가 매우 불편한 자리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안주가 나오기 전 스끼다시(밑반찬)가 깔리고 소맥을 말아서 한잔을 쨍하고 치며 마시려고 하는데 언제 준비했는지 사원님은 사이다를 유리잔에 담아서 우물쭈물하며 잔을 맞댄다. 이때 부장님이 신입사원을 향해 쏘는 날카로운 눈빛이 잡혔고 그 잠깐의 순간 쫄리게 긴장 타는 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체격이 좋은 우리 사원님은 술을 한잔도 마실 수 없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OMG
그래도 일단 오래간만에 시원한 소맥이 들어가니 맛이 일품이다. 살짝 더운 일상에 지친 날에는 이보다 더 좋은 위안이 없으리라. 시황도 괜찮겠다. 휴가 계획, 자동차 바꾼 이야기 등 스몰톡을 하다가 술이 몇 잔 들어갔을까 약간 취기가 오른 부장이 이야기한다.
부장 : 우리 사장님이 이번에 들어온 막내 좀 잘 챙겨주고 해요. 제품 같은 거 많이 알려도 주고 그리고 이 새끼 술도 한잔 못하는 고자야 고자. 앞으로가 너무 막막해 진짜
아니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다니 그리고 남의 자식을 갑자기 고자라니! 이렇게 듣고만 있기에는 분위기가 애매해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 사원님이 술이 아예 안 받으시는 거 같은데 일을 잘하면 되죠. 앞으로 잘하실 겁니다. ㅎㅎ
부장 : 이 바닥은 술 잘 마시는 것도 실력이야~ 몰라?
뭐가 삔또가 상했는지 부장님이 바로 내 말에 받아쳐버린다. 이 거래처와 나와의 관계는 명백한 갑-을 관계라 더 이상 말은 못 하고 눈앞에 조각낸 당근을 집어서 오도독 씹어 먹는다. 이미 옆을 보니 우리의 신입사원은 거의 회사돈을 날려 먹은 수준의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다. 단지 술이 몸이 안 받는 것인데 이렇게 치욕을 당하다니 나 또한 손님으로 왔는데 얼굴이 화끈거린다. 몇 시간 있었을까 부장은 과장한테 법인카드를 주고 내일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뜬다. 부장을 보내고 들어온 2차 골뱅이집, 과장님이 말해주는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과장 : 처음에 얘가 입사할 때 소주 두 병은 마실 수 있다고 했거든요. 덩치도 좋고 해서 우리는 잘 마실줄 알았는데 신입사원 환영 회식 때 소주 두 잔 먹더니 눈이 풀리면서 기절하더라고요. 우리도 깜짝 놀랐죠. 첨부터 못 마시면 못 마신다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그날 부장님이 많이 화나셨었죠.
술영업을 해야 하는 부장 입장에서도 이해가 가고 꼭 취업해야 하는 신입사원 입장에서도 이해가 간다. 면접 때 분명히 주량을 물어봤을 텐데 술 한잔 마시고 쓰러진다고 하면 안 뽑아줬을게 뻔하다. 신입직원 입장에서는 일단 질르고 보니 첩첩산중이다. 듣는 내가 더 눈물이 고이는 건 왜일까?
나 : 에이 괜찮아요. 그래도 술 못 먹는다고 회사에서 못 잘라. 만약에 자르면 고용부에 신고해 버려
사원 : ……..
오묘한 표정과 멋쩍은 표정을 번갈아 지으며 우리 신입사원은 안주로 나온 골뱅이와 소면을 성실하게 비비고 있다. 맥반석 오징어도 나오자 뜨거운 것을 참으며 열심히 오징어도 찢는다. 오징어를 집어봤는데 진짜 뜨겁다. 이 친구는 어떻게 이런 초인적인 힘으로 오징어를 찢는 것 인가.
아직 종로의 불빛이 꺼지지 않은 거리에서 다들 집에 가려고 나왔다. 과장도 따로 택시를 타러 가고 사원과 나는 가는 길이 우연히 겹쳤는지 청계천의 길을 따라가게 되었다.
사원 : 차장님 처음 뵀는데 제가 분위기를 못 맞춰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주량을 좀 늘려서 오겠습니다.
나 : 뭐가 죄송한데요? XX 씨가 저한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원래 몸에 안 받는걸 왜 억지로 먹으려고 해요? 저도 별로 안 좋아해요. 뭐든 적당히 마셔야지
사원 : 저는 그 적당히도 안 돼서 큰일이네요.
나 : 그런 말도 하지 말아요. 이 업계도 보면 술 잘 마신다고 하는 사람들 죄다 술 마시고 자빠져서 어디 까지고 휴대폰 깨지고 그런 게 뭐가 잘 마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뭐든 문제없이 술자리가 끝나야 잘 마시는 거죠. 우리나라 술문화는 진짜 미개해요. 차라리 아예 안 마시고 사고 안 치는 게 낫죠.
휴대폰 액정 깨졌다는 소리를 하니까 신입사원이 피식하고 웃는다. 이 친구도 뭔가 주변에 이런 경험이 있었는가 보다. 걷다 보니 편의점이 나온다. 제로콜라 1+1을 사서 신입사원과 짠하고 마신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 제로콜라를 마시는 것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리고 제로콜라는 혈당도 안 오른다.
사원 : 차장님 진짜 이 업계에 있으면 술을 정말 많이 마시나요?
나 : 코로나 때 많이 바뀌기는 했는데 확실히 많이 마시긴 하죠. 근데 여기만 그런 게 아냐 건설, 화학, 식품, 심지어 IT 까지도 서로 술로 죽이려고 퍼붓던데
사실을 이야기한 것인데 신입직원의 낯빛이 어둠 속에서도 더 어둑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직을 고려하는 것일 수도 있을 거 같다. 걷다 보니 벌써 동대문까지 왔다. 다음에 회사 근처에서 점심식사 하자고 인사한 뒤 신입사원은 저 멀리 버스정류장으로 총총히 사라진다. 나도 한동안 걷고 콜라까지 마시니 취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오히려 조금 배고픈 감도 든다. 정류장 근처에 편의점이 있길래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는다. 편의점 의자에 앉아서 문득 생각을 해보는데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소주보다 요아정이 훨씬 좋다. 나도 이상한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