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배신하지 않아
"통~ 통~ 통~ "
방음이 잘 안 되는 새벽의 원룸, 머리 방향 쪽 벽 너머로 탕탕이 울리는 발걸음이 들려온다.
'사장님이 오셨군'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하며 나는 잠깐 뜬 눈을 다시 깜빡거리며 남은 잠을 마저 채운다. 얼마쯤 지났을까......... 알람소리에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창문을 연뒤 아직 쌀쌀한 바람을 도구삼아 잠을 완전히 쫓는다. 밖으로 나오는 길, 사장님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와 계단을 빗자루와 걸레로 박박 닦고 계셨다.
나 : 안녕하세요.
사장님 : 304호 총각 ~ 출근하는 거예요? 잘 갔다 와요~
주름이 은은히 새겨진 건물주 사장님이 물결치는 미소와 함께 인사하신다. 사장님은 여기 원룸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호실로 부르신다. 201호 학생, 502호 아가씨, 304호 총각인 나까지, 우리는 사장님과 마주치면 각기 번호를 받아서 공부도 하러 가고 일터로 향하기도 한다. 사장님이 찍어주는 호실 숫자는 하루를 시작하는 스타팅 넘버이다.
신림역으로 향하는 버스, 콩나물시루처럼 북적이는 사람들 머리 위로 원룸촌의 호실 숫자가 상상력의 힘을 빌려 떠오른다. 아마도 저 사람은 202호, 저 사람은 404호 나는 304호, 원룸에서 나와 지하철 신림역에 도착한 청춘들은 강남, 종로, 신도림으로 흩어지며 각자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어느 날 퇴근 하고 오는 길 저녁 7시 즈음 다 돼가는 시간, 사장님한테서 전화가 온다. 월세는 자동이체로 잘 내고 있었는데 왜 전화를 하는지? 하고 살짝 긴장하며 전화를 받은 순간 사장님의 힘 빠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사장님 : 304호 총각 혹시 지금 집이에요?
나 : 집에 가는 중인데 곧 도착합니다. 무슨 일이세요?
사장님 : 아니........ 401호에 아가씨가 있는데 한번 가서 봐줄 수 있어요?
나 : 네?
사장님 : 미안해요.... 문제가 있나 봐. 불쌍한 애인데 한번 가서 봐주면 안 될까요?
대체 무슨 일인가 해서 건물에 도착 후 조심조심 올라가서 4층으로 향한다. 살짝 열린 401호의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과 훌쩍이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가 문틈으로 고개를 살짝 들이밀자 눈이 마주친 401호 아가씨는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친다.
나 : 오해하지 마시고요. 304호인데 사장님이 한번 가보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401호 : 사장님이요? 아 할머니가 가보라고 하셨구나 저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화장이 얼굴 양옆으로 번진 아가씨와 그 주위에서 멀뚱이 서 있는 나, 애매한 구도에 몇 분 할 일 없이 서있다가 괜찮다고 하니 나가볼까 하는데 갑자기 다급하게 아가씨가 좀만 더 있어달라고 한다. 뭐 이런 일이 다 있을까? 남의 방에서 앉아있기도 애매하고 서있기도 불편한 구도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데 시간이 좀 더 지났을까 사장님이 도착한다.
401호 아가씨 : 아흙 할머니 나 죽고 싶어 나는 이상한 일이 욺겻짓지맗앓
사장님 : 401호 이러지 마 잘살아야 하짌 아이고~~ 아이고~
401호 아가씨와 건물주 할머니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가족처럼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작은방에서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니까 하울링이 짱짱하게 울린다. 언제쯤 저 곡소리가 끝날 것인가,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사장님과 401호 아가씨에게 가봐도 되겠냐고 물어본다. 밑으로 내려와서 자리에서 드러누운 뒤에도 401호 아가씨의 훌쩍거림은 계속 들려왔다. 이곳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가끔씩 어떤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었는데 바로 401호에서 나오는 소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동네서 꽤 살다 보니 앞서 있던 일은 의외로 순한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월세를 안 내고 야반도주, 한밤중에 세입자들끼리 싸워서 경찰 출동, 공용 시설물을 공공연히 훔쳐가는 일까지, 생각해 보면 건물주라는 직업자체는 부럽게 다가올 거 같지만 세부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결코 만만치 않은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장님은 깊은 주름 속에서 묻어나는 인상을 팍팍 쓰며 나타나셨지만 곧장 해결하곤 하셨다. 때로는 나와 같은 세입자들의 힘을 빌려서 해결하는 경우도 있고 용역을 쓰든 본인이 직접 해결하든 아무튼 어떻게든 해결해서 그 작은 원룸 빌라는 당장의 소란이 무색하게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해서 세입자들인 청년들의 힘을 빌려 일을 해결하면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도움을 준 청년들에게 반찬이나 삶을 계란을 준다든지 해서 그 은혜는 반드시 갚고 넘어가신다.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분이다 보니 나와 같은 세입자들도 가능할 경우 기꺼이 가서 도와준다. 그런 것을 보면 사장님의 사람 다루는 스킬이 뛰어나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절 연휴였던가 하루정도 고향에 갔다가 돌아온 날에 사장님이 건물 바깥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며 일광욕을 하고 계셨다. 인사하고 들어가려는데 사장님께서 스몰톡을 걸어오셨다. 고향은 어딘지부터 만나는 여자는 있는지, 다니고 있는 직장은 다닐 만 한지 보통의 호구 조사에 대해서 성실하게 대답하였다.
사장님 : 근데 304호 총각 참 성실한데 그래도 나중에는 말이야 ~
갑자기 사장님이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서 뭔가 큰 비밀을 이야기하시려는 듯 주의를 집중시켰다.
사장님 : 총각 나중에는 진짜..... 건물을 사서 월세를 받아서 살아야 돼, 정말 그렇게 안되면 늙어서 정말 힘들어. 지금 내 친구들 아직 살아있는 애들도 연금이나 월세 나오는 거 없으면 자식들한테 눈치 보이고 아주 죽겠나 봐.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내는 거 국민연금? 그거 나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노인 되면 돈도 제대로 안 나올 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시는 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정말 나도 건물을 사야 할 거 같았다. 하지만 그때 당시 내 수중에는 아무리 모아봐야 중고 경차 한대 살 수 있을까 한 정도밖에 없으니 너무 괴리감이 크다고 할까 나는 사장님께 내 처지를 말하며 물어봤다.
나 : 사장님 근데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없는데 건물 살 돈을 어떻게 만들까요?
그러자 사장님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하셨다.
사장님 : 총각은 돈 모으면 이상한데 돈 쓰지 말고 땅을사. 앞으로 서울이 커질 거니까 김포나 파주 같은데 땅 사놓고 기다리면 가격이 뛴다니까 그때 팔아서 돈을 조금씩 모으는 거야. 애들이 주식 이런 거 많이 하던데 그런 거 하면 거의 다 망하는 거야. 땅을 사 땅을.
건물관리라는 중노동에 시달리며 평소에는 다소 힘없이 말씀하시던 사장님이 땅 이야기가 나오자 확신에 찬 목소리로 연설을 하셨다. 할머니의 주름이 그때만큼은 보톡스 맞으신 거 마냥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땅의 힘이 대단한 것이다. 수많은 굴곡을 토지와 함께 해쳐 나오신 사장님의 노하우를 일부라도 들으니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돌아서서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사장님이 한 번 더 강조하신다.
사장님 : 땅과 건물은 절대 배신 안 해. 그걸 아는 게 중요한 거야.
나를 상대로 강의하시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쏟으신 사장님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셨다. 하지만 사장님의 표정은 확신과 여유가 가득하였다. 나는 그것이 곧 승리자의 미소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