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서 저물기도 하는 것
인턴직원 : 오늘 어디 가서 밥 먹어요?
나 : 종로에 XX식당 어떤가요? 맛집이라는데
오래전 계약직으로 일하던 공공기관 사무실에서 파티션 두 블록을 사이에 두고 나는 3개월 전에 들어온 인턴 직원과 카톡을 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데면데면하며 인사하다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같은 방향으로 출퇴근을 하며 본격적으로 알게 된 그녀, 그녀의 집은 서울대입구역이고 나는 신림역에서 오가다 보니 출퇴근 시간이 맞으며 자연스럽게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서로의 TMI를 풀어내곤 하였다. 회사 주변에 갈만한 곳부터 밥 먹는 이야기까지 좁디좁은 지하철 안에서 눈을 맞추며 수많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제는 저녁까지 일상적으로 같이 먹게 되었다. 인턴은 정규직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신분, 나는 프로젝트 업무용 계약직, 자취하는 인생임과 동시에 서로가 안정적이지 못한 처지여서 그런지 서로가 쏟아내는 한풀이에 동화돼서 짧은 시간 안에 친해졌다.
한창 더운 여름쯤 되었을까 나중에는 주말에도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지하철 타고 서울 구경도 다니고 밤에는 도림천길을 따라 영화관에 같이 가서 심야영화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구로동의 어느 기다란 공원을 지날 때쯤이면 어느새인가 서로 손도 잡고 걸었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자만추의 정석을 걷고 있었다.
어느 날 신촌 거리를 걷다가 잠깐 방문한 룸카페에서 옆으로 누워서 보는 그녀의 휴대폰 화면에서 읽지도 않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몇 개 보게 되었다. 근데 그 이름들 중 한두 개 정도 익숙한 이름이 있다. XXX 대리, XXX 과장......... 살짝 스킨십하는척하면서 귀에 대고 물어보았다.
나 : 이 분들 나도 아는 그 사람이야?
여자친구 : 맞아..... 나 입사했을 때 연락처 알려달라고 하더니 가끔씩 이렇게 와
내용은 보지 말래서 클릭까지는 못했지만 대충 흐름을 보니 시간 되면 식사하자는 것이다. 다행히 깊게 진행된 건 없는지 영화 보자거나 하는 건 없었다. 살짝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묘한 승리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한편으로는 인턴직원과의 관계가 탄로 나면 여자 친구는 정규직 못되고 다시 구직활동 해야 하나 하는 약간의 불안감도 생겼다. 그래도 관계가 안 새어나가게 회사 근처에서는 조용히 있자는 무언의 약속을 하고 월요일부터는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하지만 불행은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여자 친구는 본가와 가까운 지방에 있는 공기업 채용 공고가 나면 계속 원서를 넣었고 결국은 그중 한 군데 최종 합격돼서 지금 직장에서 채용전환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그리고 서울에서도 굳이 살 필요가 없어졌다. 나도 진심으로 축하해 줬지만 아쉬운 마음을 숨길수는 없었다. 떠나기 전날, 나도 그 동네로 자리 찾아서 갈 테니까 걱정 말라는 큰소리를 쳤지만 대략적인 결말은 알고 있었다. 여자 친구는 신입사원 연수도 받고 업무에 배치될 때마다 나에게 소식을 알려왔지만 점차 소식을 알려주는 메시지의 길이도 짧아지고 있었고 역시나 바쁘게 살고 있던 나의 대답도 차츰 짧아지고 있었다. 몇 번 그녀가 있는 곳으로 여행도 할 겸 방문할 계획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있었고 자연스러웠던 만남은 자연스러운 헤어짐으로 귀결되었다.
전 여자친구 : 잘 있어? 나 볼일 있어서 주말에 서울 갈 건데 시간 되면 저녁 먹을까?
그렇게 몇 개월이 훌쩍 지나고 나도 계약직 일이 끝나고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갑자기 뜬금없이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이성(異姓)과 관련하여 긴장하게 된 경우가 얼마만인지 모른다. 27분 뒤 답장을 보내라는 알람을 맞춰놓은 뒤 답신을 보내고 그날은 '윤종신 - 너에게 간다'를 몇 번을 재생하였다.
그다음 날, 과거에 같이 자주 내렸던 지하철 시청역에서 다시 만났다. 반갑다고 인사하고 곧 서로에 대한 안부도 물었다. 같이 식사도 하고 여기저기 구경도 하다가 이제는 서로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각자의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생각났다.
나 :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알게 되고 같이 밥도 먹고 그랬을까? 사람 인연이라는 게 너무 신기한 거 같아.
여자친구 : ... 그러니까 근데 같이 있을 때 편한 게 좋은 거 같아. 우리 너무 편했었잖아 특히 지하철에서
지하철 이야기가 나오자 서로 웃음이 나왔다. 몇 분더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의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서로 잡았던 손을 놓으며 그녀는 인사를 하였다. 잠깐이었는데 그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것이 보였다. 잠깐의 시간 동안 두 가지의 선택을 놓고 고민하였다. 뛰어가서 떠나는 그녀를 잡을지 아니면 보고만 있을지 당시 나는 그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나는 떠나가는 버스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나의 어깨에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