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두 알 선물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평소에는 ‘ 여 - 야 ’ 간의 정쟁(政爭)이 살벌하게 벌어지는 곳이지만 본 회의장에서 살짝 우측에 치우쳐져서 존재하고 있는 국회도서관은 일반인도 출입가능한 매우 평화로운 공간이다.
어느 새인가 일반인도 출입증을 발급받아서 자유롭게 방문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이 따끔 방문을 하였다. 특히 전자열람실은 최신식 컴퓨터에 더블모니터가 준비되어 있어 그때 당시 공립도서관중 최고 수준의 시설을 자랑했다. 그래서 자소서을 쓸 때나 자료를 바로 인용해서 과제를 할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었다.
취업시즌이 되면 방문 횟수가 더 높아졌는데 나와 같은 상황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찾아오는 비율도 높았고 또 은퇴하신 걸로 보이는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뉴스를 보거나 독서를 하러 많이 찾아오곤 하였다. 지하철 9호선 의사당역 덕분에 접근성이 더 좋아져서 체감상 오전부터 도서관에 방문하는 열람객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전자열람실을 포함 전체 도서관에서 자주 보이는 관람객이 있었으니 거동이 다소 불편하신 할머님과 그 보호자로 보이는 분이었는데 할머니는 항상 분홍색 카디건과 동네 마실 용 단화를 신고 오셨고 보호자분은 뾰족한 부츠와 누런 외투를 매일 입고 오셨다. 취업준비를 하러 도서관 개방시간에 맞춰 가면 항상 그분들은 앞선에서 대기하고 계셨다. 도서관이 개장하면 뾰족한 부츠를 신은 분이 할머니께 ‘엄마 빨리 가자’ 하며 할머님을 부축하며 전자열람실로 향했고 높은 확률로 전자열람실에 있는 특정한 한자리를 차지한 뒤 보온통과 잡다한 잡동사니를 펼쳐 놓고 작은 파티션 사이에 그들 만의 공간을 펼쳐 놓는다. 그분들이 자리 잡은 파티션을 지나가면 약간 작은 자취방 같다고나 할까? 짧은 시간에 저렇게 자기들의 영역을 세팅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은 감탄하며 지나갔었더랬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지역 도서관에 자주 방문하는 열성 열람객 들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저분들의 가진 독특한 습성이 도서관 내 다소 논란이 있었다. 정상과 악성 민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정도로 아주 절묘하게 도서관 직원들에게 클레임을 종종 걸어왔다.
“책상이 흔들리는 것 같다.”
“의자가 불편하다.”
“밖에 시끄러운데 행사가 있냐?” (장소 특성상 행사가 많을 수밖에 없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대충 기억나는 것을 생각해 보니 이렇다. 도서관 직원과 열람객들이 인상에 남을 듯 말 듯하게 그 빈도수를 잘 조절하며 민원을 처리해 달라고 하는데 직원들도 두 모녀를 잘 알고 있는지 비교적 잘 처리해 준다. 이미 도서관내 유명 인사로 분류돼서 특별관리를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장실을 가거나 도서 대여하는 파트로 갈 때 그 두 모녀는 서로를 꼭 의지한 채 마치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분홍색 카디건을 걸친 할머니는 거동이 다소 불편하셨다. 그래서 걷는 것도 그 따님과 함께, 그리고 도시락 식사를 할 때도 그 따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식사를 하곤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저 멀리서 걸어오는 두 모녀가 보일 때면, 그때마다 다소 힘겨워하는 할머니의 발걸음을 딸이 간신히 붙잡고 가는 모습이 기억에서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따님 : 저기 죄송한데 잠시만요.
나 : 네?
어느 날인가 식곤증으로 모니터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나에게 그 따님이 말을 걸어왔다. 컴퓨터 모니터가 안 켜지는데 마침 직원이 없어서 물어볼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분들이 있는 공간으로 가자 할머니는 미동도 없이 무표정으로 모니터 방향만 바라보고 있었고 따님은 켜지지 않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이 것을 작동하게 해달라고 했다. 모니터 뒤쪽을 보니 본체 연결 케이블이 빠져 있었고 그것을 연결하자 바로 모니터가 작동되었다.
나 : 연결선이 빠진 건데 이제 잘 됩니다.
따님 : 아유 고마워요. 저희가 이런 거를 하나도 몰라서요.
갑자기 앞 파티션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 젊은 남자 한 명이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가 졸고 있을 무렵 저 남자는 뭔가 시달린 거 같지만 뇌피셜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느 날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말 11월 중순이었을 것이다. 한참 자소서를 찍어내고 조기퇴근 하러 나가는데 도서관 밖에 모과나무 가장자리에서 두 모녀가 있다. 모과나무를 보니 노랗게 잘 익은 모과가 둥글둥글하게 잘 달려있다. 딸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집게 같은 막대기로 손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모과를 하나하나씩 건져내서 돌 의자 위에 사뿐히 올려놓는다. 나름 모니터도 작동시켜 준 인연도 있으니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가던 그때 그 따님이 총총이 다가오더니 나에게 말했다.
따님 : 학생~ 이거 가져가요~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뭔가 노랗고 뭉툭한 게 외투 주머니로 쑥 들어온다. 나는 으힠하고 놀라는데 그 따님은 싱긋이 웃으며 모과나무 쪽으로 다시 돌아간다. 주머니를 보니 노랗게 잘 익은 모과 두 알이 내 주머니에 들어와 있다. 당황해서 두 모녀를 보던 순간 항상 무표정으로 계시던 할머니가 그날만은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 그 따님도 막대기를 잡은 채 미소를 띤다. 갑자기 모과가 훅 들어와서 놀라긴 했지만 그 미소에 내가 답을 안 할 수 없었다. 진한 향기를 내뿜는 모과를 주머니에 담은 채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집으로 왔다. 그날 내가 지내는 작은방에 모과향이 가득했다. 떨어지는 낙엽들의 색깔들과 가을 바람냄새가 몰려오는 듯했다. 그때 그날 두 모녀들의 미소가 뇌리에 새겨진 채 잠들었다.
매년 가을 어떠한 이유에서든 여의도를 가거나 근처를 지나갈 때 시간이 되면 국회도서관과 그 근처에 서 있는 모과나무를 방문한다. 여전히 그 모과나무는 향기 나는 모과열매를 맺고 있다. 그때 그 두 모녀는 이 곳에서 느꼈던 행복했던 기억들을 잘 간직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