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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지프 Sep 26. 2023

「죽음충동의 연원 : 회고」

영원히 회귀할 충동


 죽음충동은 언제부터 나를 괴롭혔을까. 자살과 관련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인 듯하다. 영어학원에서 배운 ‘be 동사’를 엄마에게 자랑하고 있던 날이었다. 아빠가 들어와서 소리를 지르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 난리를 쳤다. 유리문도 박살이 났다. 그날,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청심환을 주었다. 아빠는 지금 소원을 성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사회적 인정으로 달래고[자기기만], 그에 취했을지도 모른다. 파멸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무엇에 취한 사람은 정말로 그렇다.

 그다음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다. 초등학교 4~6학년 때는 나를 괴롭히는 아이가 매년 있었는데, 그때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다. 그때 나는 죽겠다며 창문(우리 집은 24층이다.)을 열고 아래를 내려 봤는데, 진짜 떨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아빠는 내 종아리를 배드민턴 채로 때렸다. 엄마는 종아리에 연고를 발라주며, 내게 자살하면 지옥에 가고 다음 생에 더 큰 아픔을 겪는다고 말했다. 그 무렵 나는 아빠를 눈물로 증오했었다. 나를 자꾸만 아프게 하니깐… 엄마는 아빠가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학대받아서, 이런 행동을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무렵 ‘부조리’를 마음으로 느꼈다. ‘왜? 그렇게 당했다면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그렇게 존경받는 초등학교 교사라면서, 그 훌륭하다는 인문학을 가르친다면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또 아무렇지 않게 친하게 지내겠지?’ 등등.

 나는 내가 그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뭔가 세계에 ‘괴리’가 존재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말에는 ‘이상’이란 게 전제되어 있는데, 나는 그 시절 ‘이상’이라는 걸 느끼지는 않았다. 내가 이상을 가질 틈을 주지 않았다. 내가 어떤 이상을 말로 뱉으면, 바로 반박당하였다. 내 끔찍한 습관 중 하나인, ‘반추’와 ‘자기검열’은 이때부터 자리를 잡았다. 반추하지 않고 자기를 검열하지 않으면 지적당할 게 뻔하니깐. 초등 교육계에서 유능하다고 정평이 난 둘이었다. 교육은 종교와 비슷하다. 입바른 소리를 하고, 바르지 않은 일을 행한다. 그 ‘괴리감’으로 교회에도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렬함-차이는 반복을 통해 자신을 개시한다고 하던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린 시절의 ‘강렬함’은 반복을 통해 자신을 개시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통합사회 과목의 출제에 결함이 있어서(두 선생님 중, 한 선생님만 학습지에 수록하시고 가르치신 문항이 출제됨), 사회 과목을 담당하신 학년 부장 선생님께 항의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계속 부인만 할 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전교 부회장이었기 때문에, 우리 반 학생 모두의 서명을 받아서 그 선생님에게 계속 의견을 전달하였다. 돌아오는 건 회피뿐. 또다시 ‘괴리’를 느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강자인 선생님이 약자인 학생들을 상대로 행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하였다. 내 기억으로 그때, 창문을 열며 죽겠다고 하는 걸 우리 반 회장 친구가 말린 것으로 기억한다.

 죽음충동이 일상이 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2학년은 내 인생 최고의 학업 성적을 자랑하던 시기였는데, 처음으로 그러한 성적을 받아봤기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타이레놀·커피(박카스, 몬스터 등)를 달고 살았다. ‘과잉 각성’ 상태에서 주변의 시선을 계속 받다 보니, ‘문과 1등’ 타이틀에 나 자신이 잡아먹혀 버렸다. 세인(世人)들의 시선에 물화(物化)되어, 본래의 자기(自己)를 망각한 셈이다. 나름 강렬하기는 했다. 나 자신을 ‘디오니소스적 자아’에 투영하여, 니체의 철학을 삶에서 구현하려 했으니깐. 어쨌든, 그 무렵 나는 ‘문과 1등’이 아닌 나를 나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사물함에 많은 양의 이부프로펜을 넣어두고, 타이레놀도 많이 넣어놨던 것 같다. 친한 친구가 그걸 보고 압수하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3학년은 죽음충동의 절정이었다. 아마도 한 의사가 말한 것처럼, 내가 그때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도 상당했을 것이다. 2020년, 12월 말부터 2월 초까지 기숙학원에 다녀왔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2월부터 5월 중순까지 코로나로 격리되었다. 집에만 있었다. 나는 코로나 블루라는 말을 싫어했다. 우울은 나약해짐이니깐. 세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며, 스트레스가 많아지며 낮밤이 바뀌었다. 카페인 복용량이 늘어났고, 뭔가 ‘달라졌다’.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정말 ‘헛되디헛된 삶’이었다.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지금은 늦었다는 감정’, 세인의 관점에서는 맞는 관점이다. 외형적이든, 내면적이든 나는 뒤틀렸으니깐…

 내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괴리’였다. 나는 10살까지는 자신감 있게 살았지만, 11살부터는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며 살았고, 그래서 ‘폭력’을 무척 싫어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자신을 뻔뻔하게 정당화하던 아이들. 사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중학교 때는 남자반에서 자행되는, 일베 노래를 합창하는 문화에 그런 ‘구토감’을 느껴서 이를 제지해달라는 탄원문을 써서 교감 선생님께 제출하였다. 돌아오는 결과는 침묵. ‘항변’은 늘 세계의 무관심으로 돌아왔다. 남자아이들은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네가 무엇이 되는 줄 아느냐’와 같은 식으로 무시했다. 여자아이들은 나를 지지해주는 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인들의 ‘웃음’을 위해서 나를 조롱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게 내가 선택한 트라우마인가? 신에게 묻는다. 정녕 내가 택한 길입니까?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중학교 친구들이 많이 없는 학교로 가서, “펭귄 날다”라는 구호로 전교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전교 회장 선거에서 처참한 득표율로 낙마한 것과는 다른 출발이었다. 낙타의 의식에서 사자의 의식이 되었다. 이전에 내가 가진 가치들을 전복하려 했다. 중학교 때는 수업 시간에 잔 적도 없고,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생각하는 ‘참학생’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를 괴롭혔던, 나를 무시했던 아이들처럼 강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도 그들과 달리 최소한 ‘논리적 일관성’을 지키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철학대로 행동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기모순을 너무나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모순 덩어리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나는 남자 중 여자, 여자 중 남자, 보수 중 진보, 진보 중 보수, 천재 중 바보, 바보 중 천재, 깨끗함 중 더러움, 더러움 중 깨끗함…이었다.

 2020년 2월~5월,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생각만 했다. 네 달 동안 세 번 정도 외출한 듯하다. 내 죄에 대하여 생각했다. 나의 모순에 대하여 생각했다. 내 위선에 대하여 생각했다. 내 억울함에 대하여 생각했다. 귀결은 ‘분노하거나 우울하거나’였다. ‘극단적으로 공부해야 성공한다. 따라서 극단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사이비 명제에 빠졌다. ‘늘 공부에 신경을 쓰고 공부만 해야 하는’ 수험생의 모습에 부합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책망했다. 답은 ‘나는 잘못 살았고, 죽어야 한다.’였다. 나름 열심히 도식을 그려가며 생각한 결과였다. 지금은 거부한 생각이지만, 세인(世人)의 삶에서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내 삶은 세속에서 아무 가치가 없었으니깐… 모든 건 지나간다는 말도 의미가 없었다. 내가 죽어도 모든 건 지나가니깐.

 그해는 학사력이 엉망이 되어, 6월 모의평가 전날 중간고사가 끝났다.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에, 그때는 ‘이러이러해서 이러이러하니 죽고 싶다’가 아닌, 바로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타이레놀 13알 정도를 먹고 잤다. 몽롱한 기분으로 6평에서 21111을 맞은 게 신기할 따름이다.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겠지만, 20~21년에는 한심한 행동을 많이 했었다.

 ‘어느 순간’ 이후로부터는 쭉, 죽음충동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그것을 안 느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도 기분이 나빠지면, 모든 게 멈춘다. 기분이 나쁜 날은 조금만 나쁜 일이 있어도 충동에 시달린다. ‘일시 정지’에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멈춘 순간에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자기기만의 탈이 벗겨지고 난 본래적 자기를 마주하는 일이란 끔찍하게도 고통스럽다. 요즘은 아빠도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많이 맞았다고 생각하지만,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이신 할아버지에게 훨씬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느꼈을 수치심… 가난하고 명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집안… 무에서 유를 만들며 살아냈다고 생각하니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 오래 버텼다고도 볼 수 있다. ‘혼자 틀어박힌 인간’에게는 어떤 철학도 죽음충동 자체를 억제할 수는 없다. 그저 버틸 뿐이다. 앞으로도 버틸 수 있을까? 왜 버텨야 할까? 영원히 회귀할 질문이다.

 괴리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힘이 있다. 거기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라는 절규가 나온다. 희망의 외침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내 항변에 무관심함을 보이는 처절함이다. 괴리를 직면하는 자는 바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느낌표를 찍고 삶을 향유하고, 무시할 것은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며 물음표에 천착한다. 이유 모를 집착과 강박이 나를 뒤로 잡아당긴다. 철학을 할 운명인가? 그런데 나는 한의대생이지 않은가? 세속에서 순수를 갈망하는 자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그는 순수에 집착만 할 뿐, 결코 순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장 깊은 심연을 헤엄하느라, 빛을 잃었을 수도 있다. ‘내 삶’의 근원적 괴리이다. 신에게 묻는다. 괴리 또한 사랑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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