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사유를 따라서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닫힌 방]의 결말에서 가르생이 외친 말이다.
사르트르는 왜 타인들이 지옥이라고 표현하였을까?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나는 도서관에서 태블릿으로 홀로 영화를 몰입하여 흥미롭게 보고 있다. 중요한 장면이 나오는 그 순간, 친구가 들어오면서 화면을 훑고 비웃으며 내 앞에 앉는다. 나는 부끄러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이것이 그리 부끄러울 일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아니리라. 하지만, 나는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사물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시선은 자유롭고자 하는 대자 존재를 즉자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이러한’ 대상이 되고, 본디의 모습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우울을 겪는다.
반대의 예를 들 수도 있다. 나는 도서관에서 홀로 두꺼운 전공 서적을 화려하게 정리하고 있다. 중요한 텍스트가 나오는 그 순간, 친구가 들어오면서 공책을 훑고 경탄의 눈빛을 보내며 내 앞에 앉는다. 나는 자부심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이것이 그리 자랑스러워할 일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니리라. 하지만, 나는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인간은 ‘이러이러한’ 대상이 되고, 본디의 모습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불안을 겪게 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인이 나를 경멸하든 타인이 나를 존경하든 타인은 지옥이다.
사물은 ‘이러이러한’ 대상으로 규정된다. 사물은 사용될 수 있다. 사물은 도구가 될 수 있다. 도구는 ‘유용하다.’ 인간을 유용성으로 판단하는 태도는, 생존에 말 그대로 유리(有利)하다. 이 태도에 따르면, 내게 쾌락을 주면 타인을 수용하고, 고통을 주면 타인을 수용하지 않으면 된다[감탄고토(甘呑苦吐)]. 내게 쾌락을 주면 타인에게 나를 개봉하고, 고통을 주면 타인에게 나를 은폐하면 된다. 아주 합리적이며 세속적(世俗的)인 태도이다. 타인으로 인해 나에게 고통이 오기 전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타인을 물화(物化)하고, 친밀함 속에서 심경(心境)을 개시하면 되는 일이다.
인간은 도구에게 어떤 ‘쓰임새’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쓰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인간은 그 도구를 버린다. 인간을 도구적으로 인식할 때 유사한 기제로, ‘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다. 하지만, 인간-존재는 ‘!-존재’의 양상으로만 타인을 파악하지도 않고, 고독의 순간에 인간-존재는 ‘?-존재’를 대면한다. 타인의 ‘?-존재’와 닮은 자기의 ‘?-존재’에 마음을 쓰는 순간, 심경은 반전되고 괴리가 느껴지며 고뇌, 즉 고통이 찾아온다. 여기서 세인(世人)의 시선은 당연히 타인을 피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듯하기도 하고, 네가 나쁘다고 말하는 듯하기도 하다. 세인의 시선을 차치하고라도, ‘?-존재’의 항변에 마음이 쓰이기 때문에, 쉬이 타인을 버리지 못하는 노릇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고뇌는 증폭되는 것이리라. 마음의 두 갈래는 우리를 괴롭게 하고, 이 고뇌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리라.
이 고뇌의 윤회(輪回)에서 잠시 도피할 수는 있고, 잠시 자기를 기만할 수는 있겠지만, 이 고뇌 자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저 모순을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살아갈 뿐이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무죄하지 않고, 누구도 절대적으로 유죄하지도 않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군가의 잘못이기도 하다. 타인에 대하여 마음 쓰지만, 그것을 은폐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심경(心境)의 울림으로 그것을 개봉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사태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구호를 변형하며 글을 닫겠다. “‘?-존재’ 자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