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발레단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시계음을 딸깍딸깍 표현하는 발레 음악의 서곡부터가 앨리스가 어떻게 해서 원더랜드에 가게 되었는지를 암시한다. 다양한 타악기를 동원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음악 자체부터가 환상적인 마법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 작품은 음악과 춤 모두 클래식 발레와 컨템포러리 발레의 경계선에 있는 작품이다.
작가 루이스 캐럴이 빅토리아 시대를 풍자했다면 안무가 크리스토퍼 휠든은 발레 작품 속에서 루이스 캐럴을 등장시킴으로써 작가와 동화 자체를 풍자한 느낌이다. 일설에 의하면 루이스 캐럴이 앨리스를 마냥 어린 아이라고 예뻐한 게 아니라고 한다. 즉 캐럴이 앨리스를 이성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본격적인 동화의 시작에 앞서 작가가 남긴 시와 동화의 끝부분에 앨리스의 풀네임으로 알파벳을 이용한 시를 읽어보면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소수 의견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하기에는 그렇다. 상당히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막을 알고 발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막을 보면 더욱 재미있다.
1막에서 루이스 캐럴이 앨리스에게 무언가를 준다. 그 무언가는 바로 하트였다. 둘이 그 무언가를 펼치자 하트가 줄줄이 햄처럼 나온다. 바로 그때 현악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앨리스의 엄마가 다가와 그 하트들을 찢어버린다. 실제로 루이스 캐럴이 앨리스의 부모에게 딸과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 계급 이상의 부모들은 남자쪽의 재산을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앨리스의 부모는 집안에 돈이 없었던 캐럴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캐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앨리스는 부모님이 맺어준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캐럴은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수학자였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던 캐럴은 앨리스의 집안과 왕래를 했던 시기에 아이들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특히 앨리스의 사진들이 많았다. 크리스토퍼 휠든은 1막에서 이런 실화들을 그대로 재현했다. 무엇보다도 1막에서 제일 압권은 루이스 캐럴이 잠든 앨리스를 사진 찍다가 토끼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마치 신데렐라가 누더기 차림에서 공주로 변신하는 과정만큼이나 흥미로운데, 영국인 특유의 유머코드까지 가미되어서 감상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웃음이 터져나오는 장면이다.
로열 발레단은 어떻게 이런 발레를 만들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마법 그 자체이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떨어지는 장면부터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옵아트와 스크린 투사 등의 다양한 미술 기법, 첨단 기술을 동원한 무대 연출로 동화 속 에피소드를 그대로 재현했다. 앨리스가 원더랜드에서 뭘 마시고, 먹을 때마다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장면도 조명과 무대 배경을 이용한 착시효과로 표현했다. 스크린 투사를 이용한 눈물 웅덩이 에피소드, art와 tart 그리고 Start로 연결되는 알파벳 장난과 함께 시작되는 코커스 경주, 당대에는 비싼 향신료였던 후추가루를 과시하듯 뿌려대는 공작부인의 모습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깨알같은 재미가 가득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하이라이트는 모자장수의 탭댄스와 하트 여왕의 타르트 아다지오이다. 마치 팀 버튼 감독이 영화 홍보 포스터에서 정작 앨리스보다도 모자 장수와 붉은 여왕을 강조한 것처럼 로열 발레단도 모자장수의 이상한 다과회와 하트 여왕이 홍학으로 고슴도치를 굴리는 크로켓 경기 그리고 타르트 에피소드에 공을 들인 느낌이다. 로열 발레단이 이 작품의 홍보용으로 제작한 영상물도 대체로 모자 장수를 컨셉으로 한 영상물이 많았다.
https://youtu.be/nYbyGxS3zJU?si=UyVqVxe1yttiGluU
작품 속에서 탭댄스를 추는 모자장수는 탭댄서가 아닌 발레리노가 추는 탭댄스이기 때문에 클래식 발레 테크닉을 유지하면서 춰야 한다. 그러나 탭댄스와 클래식 발레는 전혀 상반된 춤이다. 모자장수 역을 맡았던 발레리노 스티븐 맥레이는 인터뷰에서 "발레에서는 돌고 뛰어도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해야 하는데, 탭댄스는 바닥에서 소리가 나야 하기 때문에 (춤을 연습할 때)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탭댄스용 슈즈를 신는 순간 신체가 특정 모드로 전환이 되어 무릎은 가볍게 움직이더라도 (무게 중심이) 자꾸 바닥에 닿으려고 했다. 하지만 클래식 발레는 (원래 천상에 닿으려는 춤이기 때문에 호흡을 끌어올리면서) 업을 해야 하는 춤이기에 전혀 다른 두 가지 기술을 결합해서 춤을 춰야 했다."라고 말했다.
https://youtu.be/vYJzk9WhyTQ?si=bkThIu5D0TtN5h-5
https://youtu.be/Kq8zqhqjUIo?si=kjLoMw2CSY4mqe7K
이렇듯 무용수는 연습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감상자에게는 가장 몰입이 되는 장면 중 하나다. 장면 전환이 되는 순간 존 테니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를 그대로 재현한 소품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잠시 뒤에 시작되는 이상한 다과회와 말장난들을 탭댄스로 표현한 모자장수의 다이내믹한 춤에 빠져든다. 타르트를 훔친 범인을 잡기 위해 연 재판 장면에서도 동화 속 말장난과 어수선한 분위기를 모자장수와 삼월토끼의 탭댄스로 묘사한 연출도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감상자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클래식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중 오로라 공주의 '로즈 아다지오'를 패러디한 하트 여왕의 '타르트 아다지오'는 영국인들 특유의 풍자 본능과 블랙유머가 총집합한 베리에이션이다. 고전 발레를 패러디한 아다지오를 추면서 동시에 동화 속 여왕처럼 강하고 쎈 캐릭터를 춤으로 연기해야 하는 하트 여왕의 베리에이션은 관객에게 웃음까지 전달해야 하는 배역으로 보는 내내 웃음이 터져나오면서도 심장이 쫄깃해지는 장면이다. 라우라 모레라, 제나이다 야노프스키가 춘 것을 봤는데, 특히 야노프스키의 춤과 연기가 이 블랙 유머에 제격이다. 야노프스키의 경우 로열 발레단에서 오로라 공주 역에 캐스팅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데, 이 작품에서 패러디 버전을 춤으로써 드디어 꿈이 실현되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https://youtu.be/ImXCSNPvLRs?si=0UTAq09oV0L1Jm8R
https://youtu.be/T978Y8_YQqs?si=2hQ9xm5fqlax1g45
3막의 카드댄스 또한 환상적이다. 스크린 투사를 이용한 카드들이 무대 배경에서 펼쳐지고 뒤집히고 겹치는 것을 춤으로 형상화했는데, 이 장면이 정말 끝내준다. 음악과 춤이 일치한데다 무대의상까지 마법같은 연출에 한몫한다.
https://youtu.be/zP-BWqQHuV4?si=7KukQ94yQwKMoNoK
이처럼 동화 속 에피소드들을 마법같은 장면전환과 환상적인 연출을 통해 탭댄스와 컨템포러리 발레로 표현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와 잭(또는 하트 잭)이 파드 되를 추는 부분에서야 아름다운 클래식 발레가 나온다. 앨리스와 (하트) 잭이 클래식 발레를 춤으로써 비록 이 작품이 기발하게 경계를 넘나들더라도 어디까지나 고전발레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https://youtu.be/ZNTy_4StXQ4?si=KS14yQT9iJ5Rgz_n
크리스토퍼 휠든은 인터뷰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른과 아이들 모두가 만족하는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동의한다.
https://youtu.be/urN6ypzZnfo?si=9xnknzv7lTD6Sz-B
문득 막연하게 든 생각이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영국인들이 무척 학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인하고는 방향성이 다른) 학구적인 태도와 연구 지향적이고 탐구심과 호기심이 많았기에 이런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돈을 많이 들였다고 해서 이런 어메이징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혁신의 아이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그렇게 창조적인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오히려 본질을 추구한 것과 일맥상통한 걸까?
https://youtu.be/D1pUDnHlLQQ?si=TSiDW2PZvrzxzlmC
멘토 멘티를 중시하는 로열 발레단은 과거에 해당 배역을 맡았던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춤과 연기를 전수한다. 2011년 버전에서 하트 여왕을 맡았던 제나이다 야노프스키가 역시 같은 버전에서 딸 앨리스 역을 맡았던 로렌 커버슨에게 최근에 하트 여왕의 춤과 연기를 전수했다.
작품 속에서 스티븐 맥레이의 이미지는 언제나 강렬했다. 광기어린 황태자(마이얼링), 미치광이 모자장수(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옹졸한 오베른 왕(한여름 밤의 꿈). 특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탭댄스를 추다가 앨리스에게 새침한 표정을 지은 후 클래식 발레 동작으로 회전을 하고 퇴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렇듯 차도남 같은 이미지를 발산하는 스티븐 맥레이. 그런데 차도남인 줄 알았더니 현실세계에서는 아이가 셋, 매우 다정한 아빠, 어쩌다 발레 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는 자상한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완전히 반전 매력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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