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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혼들의비행 Mar 06. 2023

[독립 2] 내가 제일 마지막에 왔지

비혼들의비행_비혼여성공동체 비비로 살아가기

[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독립 2] #. 내가 제일 마지막에 왔지     


비비는 2009년 꽃내 감독의 ‘비혼비행’ 다큐멘타리 제작에 참여했다.      


#1.

딸깍, 나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어색함을 감추고, 어서들 오시오, 인사를 나눈다. 앗, 들어오는 이들은 카메라 마중에 놀란다. 나의 일곱 번째 집에 비비 구성원들이 도착한다. 우리는 정기모임 학습 도서로 읽기로 한 미리암 그린스팬의 『감정 공부』를 펼쳐놓고, 음식쓰레기 처리 방법에 대해 심하게 열띤 토론을 한다.     


우리 아파트에 원래 음식물 쓰레기를 봉투째 넣는 사람이 없었거든.

가장 먼저 임대아파트에 터를 잡은 ‘마을’이 흥분한다.

그 아저씨는 택시기사인데, 연탄재를 꼭 우리 동네 와서 버리더라.

완주에 사는 ‘푸른산’이 시골 풍경을 전한다.

거기가 그 아저씨 땅이래?

촌철살인 ‘반짝별’이 거든다.

하하하, 한바탕 웃음소리가 화면을 뚫고 나온다.

근데, 책 이야기는 언제 하는 거지?    

 

모임 초기에는 ‘마을’ 사무실에서 정기모임을 했다. 거기에서 만든 소모임이었으니까. 2000년대 초반, ‘비혼’이라는 단어가 포털 검색에 나오기 전, ‘비혼’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계속 설명하던 때, ‘비혼모임’으로 만든 소모임 ‘비비’는 ‘너희는 뭐 하는 애들이야?’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비비의 정체를 굳이 말한다 한들 제대로 이해하는 시선은 많지 않았다. 2006년 ‘비혼들의비행’ 정관을 만들고 독자적으로 독립했다. 우리는 스스로 모임을 넘어 ‘공동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비혼여성공동체 비비’라는 정치적 이름을 얻었다. 나는 한결 가뿐했다. 더는 ‘그것이 아니고요.’를 연발하지 않고, 나는 ‘비비’야, 말하면 되었다.     


2006년 ‘마을’이 먼저 독립했다. 당시 무주택이면 신청할 수 있었던 17평 임대아파트, 혼자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원룸, 주택보다 안전했다. 공고가 날 때마다 재빠르게 공유했다. 보증금이 부족할 때는 비비 회비에서 충당했다. 입주 날짜가 정해지면 청소 용역단으로 출동해서 같이 청소했다. ‘주거 독립’은 그 어떤 독립보다 일상의 현실감을 주었다. 아, 나, 진짜 독립했어. 결혼하지 않아도 독립할 수 있구나. 비비의 역동은 서로의 모델링이 되어줄 때 빛이 났다. 3년 안에 네 명이 같은 아파트에 입주했다. 모임 장소는 자연스레 ‘마을’ 집으로 바뀌었다. 직장 근거리에 사는 나와, 노모와 함께 사는 ‘푸른산’이 모임 때마다 아파트로 왔다가 돌아가곤 했다.     


#2.

‘1인가구 네트워크’라는 타이틀과 함께 아파트 그림 위에 ‘천영네, 반짝별네, 주얼네, 마을네’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카메라도 따라간다. 천영네 집에서 받은 김이 반짝별네로 전달되고, 마을은 거기서 갓김치와 빵을 받아서 주얼네로 간다. 우리는 같은 구조, 다른 풍경을 보고 같은 집에서 살기는 어렵겠구나, 가늠했다. ‘마을’의 말처럼 우리 그렇게 해서 같이 살자, 이런 얘기해본 적 없었다. 기약, 약속, 책임 이런 것들은 그런 ‘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관계를 통해서 교류되는 것이었다. 이어서 ‘반짝별’이 촌철살인을 날린다.    

 

우리 모임이 신기한 점은 ‘마을언니’를 구심점으로 해서 부챗살처럼 모인 멤버들이거든.

처음에 모였을 때 언니의 긴장감이 나중에 보였던 거 같아.

지금은 사실 대개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거든.

하지만 ‘우리’라는 것도 강화되었고, 그래서 나는 ‘유기체’라고 하는 거야. 우리 ‘공동체’가.   

  

아파트 입성은 나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나는 만년 팀장으로 언제까지 직장을 다닐 것인지, 언제까지 마우스를 잡고 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무실이 이사할 때마다 직장을 따라 집도 사무실 근처로 이사했다. 전세금을 모아서 2년마다 한 번씩, 일곱 번째 이사한 집은 1층에는 주인 세대가 살고, 2층에는 두 집이 사는 16평 주택이었다. 방 2, 주방 겸 거실, 화장실이 있었다. 아름다웠다. 아직, 그다음 이사할 집을 상상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결정해야 할 사항은 직장의 퇴사 시점이었다. 마음 한편에는 비비가 사는 아파트로 주거지를 옮기고 싶은 마음, 너무 가까운 거리인가 고민하는 마음, 결정적으로 17평은 당시 살고 있던 집보다 더 나은 집이라고 하기에는 방이 하나뿐이었다. 공고가 날 때마다 17평 도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벽면이 모자랐다. 긴 자취생활로 살림살이가 많았다. 모임의 생활 반경이 아파트로 옮겨갔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봐서는 나 또한 그곳으로 가리라고 마음먹었다. 때를 기다렸다. 운은 그럴 때 작동했다. 두 동만 있어서, 잘 나지 않는 22평 공고가 났다. 일단 신청했다. 난생처음 당첨이란 것이 되었다. 나는 2010년 2월 4일 입춘날에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3월 12일 근무 15년에서 석 달 모자란 날에 퇴사했다. 그리고 마을, 주얼과 함께 아파트 근처로 사무실을 알아보러 다녔다. 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1인가구 네트워크 생활공동체에 안착했다.     


비비는 2010년 6월 15일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를 개소했다. 사무실은 집에서 7분 거리다. 그곳에서 비혼 담론을 위한 ‘비혼객잔’을 열었다. 3차 주제로 ‘독립만세’를 정했다. 독립을 한 계기는 다양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너무 싫어서 ‘재금’을 나오기도 했고, 노트북을 샀는데 그 노트북 하나를 놓을 공간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로 독립할 것인가? 비혼여성 1인 가구에게 집을 선택하는 1순위 기준은 무엇일까? 공간비비에 찾아온 비혼여성들에게 아파트 홍보대사처럼 비비의 주거 독립 실천 과정을 소상히 알렸다. 여기로 오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결혼하지 않고, 독립하는 여자들이 아파트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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