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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혼들의비행 Feb 27. 2023

[독립 1] 여덟 번째 집

비혼들의비행_비혼여성공동체 비비로 살아가기

[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남한테 폐 끼치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앞가림은 하고 살아야 한다고 본능으로 알아챘다.

타인보다 나를 믿었다.

비혼 생활로 접어들면서 ‘혼자 사는 삶’은 명료해졌다.

나는 1인 가구로, 비비와 이웃으로 살면서 독립을 넘어 자립할 수 있었다.

외로움은 갖다 버려도 좋을 만큼.        

  


[독립 1] #. 여덟 번째 집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고 싶다.

아니, 집에 가고 싶다.

아니, 혼자 있고 싶다.    

 

내 나이 열아홉에 전주에 올라왔다. 때맞춰 갈아줘야 하는 연탄부터, 겨울만 되면 고장 나는 기름보일러를 거쳐, 결재만 하면 되는 도시가스까지, 그것도 부엌일까 싶은, 벽 없는 곳 덩그런 찬장 하나 석유풍로 하나에서, 싱크대가 있고 가스레인지를 놓을 수 있는 입식 주방까지, 주인 눈치 보며 배를 쥐어 잡고 다닌, 주인집 마당에 있는 공용 변소에서, 집안에 붙어있는 개인 변기, 심지어 샤워기까지 달린 욕실까지, 더할 나위 없는 집, 22평 임대아파트가 30년 나의 주거 독립 현주소다.    

 

무엇보다 원한 것은 세탁기를 놓을 수 있고, 거기서 바로 빨래를 널 수 있는 베란다였다. 오늘은 이 프레임으로 충만하다. 수선화가 일찌감치 봄을 알리고 있고, 장미 허브는 조도에 따라 잎 색을 달리하며, 청보랏빛 꽃무늬 천이 바람에 흩날리고, 잠깐 독서를 위해 놓은 캠핑 의자 위로 햇살이 쏟아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 있는 곳, 여덟 번째 집이다. 베란다 밖으로 비비 구성원들이 사는 동이 지척에 보인다.  

   

자취는 고3 때, 대학 가려고 학교 앞에서 친구랑 시작했다. 2인 기숙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비자발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이 빨랐다. 대학생이 되고, 오빠와 외할머니와 살다가, 외할머니와 여동생과 살다가, 여동생과 살다가, 나는 서른셋부터 혼자 살았다. 오빠와 여동생은 결혼을 통해 독립했고, 결혼하지 않은 나는 1인 가구로 남았다.

     

자취방은 부모님 종잣돈으로 마련했다. 이사할 때마다 구성원이 바뀌었고, 오빠가 떠난 이후로는 전세 계약할 때 임차인란에 내 이름을 적었다. 자취가 독립으로 바뀐 시점, 나는 세대주가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내 월급에서 월세를 내고, 전기요금, 도시가스요금, 수도요금, 주민세 등 고정비용을 계산했다. 살림살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세금 내는 시민임을 실감했다. 임대인 요구로 이사할 때도 있었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집에서 살고파 부지런히 전세금을 모았다. 경제적 독립은 가장 먼저 주거 독립으로 직결되었다.     


모처럼 일정 없는 텅 빈 주말이다. 공간비비 일정도, 내가 맡은 모임도, 사적 약속도 완벽하게 없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시골집에 한 번 가야 하는데. 다음 주말에도, 그다음 주말에도 일정 있는데. 나는 ‘모처럼’ 격렬히 집에 있고 싶다. 지난 2007년에 너무 더워 울다 지쳐 거금을 주고 에어컨을 샀다.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이다. 12년이 지났다. 푹푹 쪄대는 여름, 야심 차게 에어컨을 틀었다. 뭔가 이상하다. 온도는 쉽사리 내려가지 않고, 뜨르륵, 띠리리, 소리가 나고, 결국 바닥에 물이 샜다.     


A/S를 신청했다. 새로 사야 하는 건가, 돈 들어갈 일 생기는 건가. 가스를 주입했으니 온도는 내려갈 것이고,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에어컨을 다 뜯었지만 찾지 못했다. 부품이 깨진 것은 아니니 이상은 없는 것이고, 물이 새는 것은 부품이 낡아서 그런 것이니 물이 흐르면 바닥을 닦으라고, 에어컨의 모든 부품이 곧 수명을 다할 것임을 미리 확인받았다. 그래도 ‘당분간’ 에어컨은 돌아간다. 에어컨에 생명체가 사는 것처럼, 여전히 소리가 난다. 띠띠띠. 뜨뜨뜨. 다행히 물은 더 새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 에어컨이 예고 없이 멈출지 모르는 일이다. 올여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고장 난 에어컨을 당분간 살려내고, 시원한 거실을 바라보며 여기가 좋은데, 씻고 누워서 잡지를 보면 딱 좋을 텐데. 토요일 아침, 1박 2일 가방을 싸놓고 시골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마침 일요일 아침에 외출 일정이 있으시다고. 가방을 다시 풀고, 걸리는 마음도 풀었다. 그때부터 나는 거실 바닥과 한몸이 되었다. 6인용 테이블을 옆에 두고, 거실 바닥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고, 누워서 손에 들고 읽어도 팔이 아프지 않을 정도의 얇은 잡지를 읽었다. 나는 잠시 이 집 관리인 정체를 잊었다. 살림살이도 잊었다. 오로지 쾌락을 찾는 나만 존재하는 순간. 나만의 거실은 에어컨이 돌아갈 때 비로소 아름답다. 나는 이듬해 6월, 근로장려금으로 여름이 오기도 전 부랴부랴 2in1 에어컨을 침실과 거실에 설치했다. 자유와 책임은 늘 ‘한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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