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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혼들의비행 Jun 03. 2023

[소설 2] 내년에는 누구를 읽지?

비혼들의비행_비혼여성공동체 비비로 살아가기

[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소설 2] #. 내년에는 누구를 읽지?


인생 2막은 쉽게 펼쳐지지 않았다. 15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공간비비로 출근하면서 나는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다. 몸과 마음의 전환이 절실했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비는 비혼여성이 연결할 수 있는 장으로서 공간비비를 마련했지만, 이곳이 여성들의 지지와 연대를 만들어가는 우정의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마을이 ‘걷기여행’, ‘공동체상영’을 만들고, 주얼이 ‘생활요가’를 지도했다. 반짝별이 ‘영어읽기’를 꾸렸다. 나는 ‘소설읽기’에 도전했다. 각자 역량으로 시작한 일상 프로그램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모집했다. 그때부터 나의 즐거움은 나의 ‘일’이 되었다.


출근하고 컴퓨터를 켠 후 이메일을 확인하고, 인터넷서점 사이트로 직행한다. 관심 작가 신간이 나왔는지, 최근 발표하는 작품 성향은 어떤지, 읽기로 정한 작가 중고 상품이 떴는지, 내년에는 어떤 작가를 읽을지, 작가들의 연결고리를 찾아 실타래를 풀었다가 감았다가 한다. 1년 동안 읽을 작가 일곱 명을 선정하여, 한 작가당 단편과 장편을 섞어 세 권씩 고르고, 한 권을 미리 읽어본다. 공간비비에 비치할 책과 내가 읽을 책을 사고, 도서관에 검색하여 선정한 책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는 책은 세 권씩 희망 도서를 일삼아 신청한다. 나의 신경은 온통 ‘내년에는 어떤 작가들을 연결해서 소설읽기 모임에서 함께 읽으면 좋을까?’에 쏠려 있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나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작은 기쁨’을 떠올렸다. 오전반은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오후반은 비혼여성을 대상으로 격주로 진행했다. 일하는 기혼여성이 오후반에 오고, 비정규직 비혼여성이 오전반에 참여하면서 이런 구분은 무색해졌다. 참여자들의 연령대와 기혼, 비혼을 고려하여 동시대 작가군을 읽었다. 나는 양쪽을 넘나들며 혼자서 바빴다. 각자 소설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어 독자의 조건은 필요 없었다. 양쪽 감흥을 퍼 나르다가 급기야 이듬해, 서로의 작가군을 바꿔서 읽었다. 이런 안내와 더불어, ‘오전반에서 반응 좋았어요.’


나는 기획을 수정했다. 규칙과 형식을 최소화했다. 나의 발제를 없앴다. 밑줄긋기와 낭독 타임을 없앴다. 읽기가 쓰기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포부는 바로 접었다. 작가 선정을 통일했다. 나는 ‘책과 친해지기 & 타인과 공감하기 & 달라진 나 발견하기’ 취지 대신에 ‘부담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입니다. 가끔 울림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안내했다. 참여자들에게 부담이 아닌 ‘작은 기쁨’의 자리가 되기를 바랐다. 규칙은 하나, 소설을 읽어오세요. 형식은, 이야기하면 됩니다.


작가를 통일하고, 우리는 동시에 ‘김이설’을 읽었다. 나는 반응을 살폈다. 소설 속 면도날로 손목을 그은 듯한 지독한 현실을 참여자들이 ‘어렵네요.’라고 퉁쳐버리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다.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눈을 뜰 수도 없고, 눈을 감을 수도 없는 불편함이 주는 미학은 무엇일까? 현실보다 더 가혹한 소설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했다. 아니, 현실이 더 가혹할까? 소설이 끝나고, 작가가 궁금하다고, 초대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낸 경우는 김이설이 처음이었다.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그해 겨울, 그가 왔다. 쉽지 않은 발걸음에 어떻게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이런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고, 본인 전작을 다 읽은 것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역시 세 권 읽길 잘했어. 그는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먼저 이야기를 풀어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세 시간으로도 모자랐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 때 쓴 소설이 가장 날카롭다는 이야기, 피도 눈물도 동정도 없는 등단작 「열세 살」에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 연애담이 아닌 사회면을 읽기 시작한 이야기, 소설을 왜 읽느냐? 살만한 세상인가, 자문하게끔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 작가는 왜 『환영』의 윤영을 죽이지 않았는가에 대한 이야기, 문제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을 밀쳐내면서 글을 쓴다는 이야기, 그래서 『선화』는 본인에게는 밀쳐내지 못해 미진했는데 독자들은 그 인물에 그간 힘든 소설에 대한 위안을 느꼈다는 이야기.


우리는 그 이후로도 여기에 적을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를 나눴다. 소설읽기 오전반, 오후반, 글쓰기 후속모임, 탐독耽讀 참여자들까지, 김이설을 읽은 여성들이 한데 모였다. 소설은 읽기에서 쓰기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의 만남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이듬해, ‘사무치는 봄, 입니다. 그래도 굳건히 건재하십시오. 감사와 연대의 마음을 담아.’ 새긴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가 공간비비에 도착했다. 


그는 기억할까? 우리의 뜨거웠던 만남을. 테이블 세 개를 나란히 붙이고, 바로 코앞에서 소설을 매개로, 한 독자로서, 한 여성으로서 같이 격분하다가, 같이 감응했다는 것을. 취향을 넘은 읽기를 통해 불편한 진실을 바라볼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같이 읽길 잘했어.


혼자서 소설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나눌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을 읽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우리는 소설을 읽은 그다음을 이야기한다. 소설에서 본 것, 소설에서 느낀 것, 소설에서 알 수 없는 것, 소설에서 혼란스러운 것, 소설에서 즐거웠던 것, 소설에서 마음이 움직인 것, 소설에서, 소설에서. 나는 이야기가 서로 부딪혔다가 서로 만났다가 서로 지나갔다가 서로 갈 길을 잃고 삼천포로 빠지는 것을 잡아 오곤 했다. ‘자, 소설로 돌아옵시다.’ 그것 또한 소설이 있었기에 가능한 삶의 이야기였다. 소설을 함께 이야기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 끈, 나눔이 주는 힘, 공동체의 힘이 보였다.


내가 소설읽기 모임을 안내하지 않았다면, 나는 취향의 극단으로 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참여자들 이야기 덕분이다. 소설을 이야기할 뿐인데도 반응은 태도를 여실히 드러낸다. 나는 분명하게 타자를 만났다고 체감한다. 그래, 너와 나는 다르구나. 소설에서만큼은 나와 다른 낯설고 불편한 세계에 호기심이 열린다. 몹시 까다로운 나는 약소한 너그러움을 얻었다. 그래,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어. 심약한 나는 트러블과 함께 할 용기를 얻었다. 그래, 함께 가 보는 거야.


오늘은 이런 간증을 들었다.

“저 소설 많이 안 읽어봐서요. 처음에는 소설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지금은 소설을 그냥 느껴보려고요.”

“보람차네요.”

나는 ‘봄봄의 소설읽기’ 모임을 나의 인생 2막이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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