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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혼들의비행 Jun 03. 2023

[소설 3]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비혼들의비행_비혼여성공동체 비비로 살아가기

[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소설 3] #.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_카슨 매컬러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리뷰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이런 심심하고 뜬금없는 질문을 받으면 창 넓은 카페에 앉아 커피라도 한 잔 앞에 놓고 긴 대화를 해야 하나 싶다. 그대가 생각하는 외로움이란 무엇인가요? 그대에게 가장 외로운 순간은 언제였나요? 그대는 언제 ‘외롭다’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었나요?


소설읽기 모임에서 읽은 카슨 매컬러스는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에서 형용사가 아닌 동사로 분한 외로움을 소설화하여 보여준다. 두꺼운 페이지, 빼곡한 글씨, 외로움을 어찌할 바 몰라 토해내는 인간 군상들, 황량하고 스산한 남부, 거기에 카페가 있고, 이야기를 듣는 벙어리 ‘싱어’가 있고, 그들을 바라보는 카페 주인 ‘비프’가 있다. 


그리고 여기 내가 있다. 비비는 공간비비를 개소하면서 북카페를 상상했다. 커피를 한 잔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이곳에 와서 외롭지 않게 서로의 연결을 느끼면 얼마나 좋을까? 때론 고독하게 창 넓은 곳에 앉아 책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공간은 카페가 아니라 사랑방이 되었다. 그래도 커피는 마셨다. 주얼은 날마다 커피를 갈아, 핸드드립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팔았다면 더 많은 비혼여성이 문을 두드렸을까? 가끔 그들이 찾아왔다.


비프는 벙어리가 볼 수 있도록 천천히 발음했다. “대단히 불안한 거요.” 그는 대화하듯 말했다. 수프에서 나오는 김이 블런트 쪽으로 갔고 잠시 후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잡았다. 두껍고 무거운 입술이 여전히 떨리자 그는 접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비프는 이 사실에 주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의 특정부분을 가리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벙어리의 경우에는 손이었다. 비프 자신은 어디일까? [카슨 매컬러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1-42p]


카슨 매컬러스는 왜 싱어에게 ‘말’을 주지 않았을까? 초면에도 쉼 없이 자기 이야기를 내뱉는 이들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이 외롭나 생각한다. 아, 이야기하러 왔구나. 그 어떤 일방통행보다 강력하다. 그들에게도 듣기만 하는 싱어가, 수프와 커피를 건네는 싱어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유일하게 마음을 토로하지 않는 인물, 비프는 무엇을 가리고 싶어 했을까? 우리는 서로에게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마음도 있지만, 말해도 도대체 알 수 없는 마음도 있었다. 형체도 없는 내 마음을 네가 알 수 있도록 너에게 잘 전달하고, 네 마음을 내가 잘 알아채는 데에는 기술이 필요했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난 결혼하지 않았고, 동거인이 없고, 1인 가구, 단독 세대주이다. 주거 형태로 보자면 혼자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종일 혼자 사는 집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집을 나서면 공간비비에서의 생활이 이어진다. 밖에서 늘 사람들과 생활하다 보면 혼자 지낼 집으로 가고 싶어지니 내게는 ‘혼자’와 ‘외로움’은 등가에서 벗어나는 공식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외로웠나?


그들은 한 사람씩 싱어의 방에 와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벙어리는 언제나 사려 깊고 침착했다. 다양한 색채를 띤 그의 부드러운 두 눈은 마법사의 눈 같았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 벙어리는 언제나 이해해준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는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앞 책, 121p]


사실과 감정은 하늘과 땅 차이, 다른 세계라는 것을 혼자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알 수 있다. 싱어가 그들의 말을 이해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그들이 싱어가 자기들의 말을 이해해준다고 느낀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느낀 것은 사실보다는 감정에 가깝다. 감정은 때론 더 사실적이다. 그러니 ‘난 당신의 말을 이해했어요.’와 ‘난 당신의 말을 이해한다고 느껴졌어요.’는 다른 세계다. 그래서 공동체적 삶에서 그 ‘공동’은 미세한 차이로 불통을 불러오거나 동상이몽에 맞닥뜨린다.


그들은 내 방에 와서 말을 해. 난 그들이 어떻게 지치지도, 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오늘 그들이 모두 동시에 내 방에 왔었어. 그런데 마치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처럼 앉아 있는 거야. 서로 무례하기까지 했어. 난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어. 그리고 너는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서 이 편지를 쓰는 거야. 묘한 기분이야. [앞 책, 265-266p]


그대가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싱어는 ‘난 너희를 이해하지 못했어’라고 그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너는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서’ 너에게 편지를 보낸다. ‘너’는 또 싱어와 같은 말을 누군가에게 할지 모른다. ‘나는 싱어를 이해하지 못했어’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소설에서 이 외로운 편지를 받는 이의 답장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나올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싱어조차도 외로운 나머지 사냥꾼이 되었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카슨 매컬러스는 그들을 혼자 살게 두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카페를 만들고, 그들을 오고 가게 했지만, 누구도 소통이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었다. 오로지 듣기만 하는 싱어에게 대화가 아닌 말을 할 뿐. ‘이해’라는 단어는 혼자가 아닌 타인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적 생활을 한 지 이십여 년이 되어간다. 만나서 놀기에 바쁜 나날이 있었고, 공부하고 열중하고 성장하는 나날이 있었고, 새로운 삶의 형태를 도모하는 나날이 있었고, 적응하고 부딪히고 감당하는 나날이 있었고, 삶이 더 실천으로 다가오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축에 있는 마을, 주얼과 더불어 문장을 만든다. 마을이 물음표를 먼저 던지고, 주얼이 느낌표나 마침표를 이미 찍었을 때, 나는 쉼표를 그리고 잠시 멈추어 있다. 물음표에 잘 답해야 하고, 마침표를 수정하면 곤란하다고 여겨지는 나는 계속 복화술을 하거나 여백을 찾는다. 


마을이 나를 잘 이해한다고 느껴지지만, 내가 주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이 두 가지에서 불가의 영역이 있음을 알았다. 마을이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고, 내가 주얼을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 있었다. 이것이 다만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지점일 뿐이다. 그러니 정확하게는 내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자각이 들었을 때 나는 외로웠다.


오래간만에 시골 친구와 친구 남편을 만났다.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같은 질문은 받지 않았다. 어떻게 살고 있냐는 남편 질문에 나는 삐질삐질 말했다. 우리도 이것이 새로운 형태라서요.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는데, 남편은 그래도 잘 모르겠다고 하고, 친구는 조금 알겠다고 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보다 그가 이해한 것은 무엇일까. 그녀가 이해한 것보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가 그것이 아스라한 외로움으로 전해왔다. 소통 불가 영역에서 내 외로움을 어찌할 바 모르고 있을 때, 순간순간 마주하는 동상이몽을 견딜 수 없을 때,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다. 소설만이 날 이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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