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전주에 가면 ‘비비’가 있다.
그들은 비혼여성, 1인가구로서 우정과 돌봄을 나누며 생활공동체를 이루었다.
나는 그들과 헤어지지 않고 20년을 지나왔다.
[공동체 1] #. 배신의 기억
TV 예능 ‘몰래카메라’가 있었다. 마지막에 이경규가 나타나면 아, 이것이 몰래카메라였구나, 모두 알게 된다. 이 상황을 모르는 당사자는 같이 웃을 수도, 혼자 웃지 않을 수도 없는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선다. 화면 안에서 이경규가 ‘몰래카메랍니다.’ 외치며 웃고, 나는 화면 밖에서 불편함을 넘어 화가 났다.
너의 마음을 모르는 나는 바보가 된다. 나는 너를 바보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나의 마음을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네가 알 수 있도록. 우리는 줄곧 혼잣말하지 않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진실 따위 관심 없다. 네가 거짓을 말한들, 네가 사실을 말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만 나를 기만하지 말라. 그날부터 나는 세상에 속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함에도 숱한 배신의 낱알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었다. 직장생활 경력처럼.
대학교 입학 전 겨울, 들뜬 마음으로 시내를 활보했다. 누가 보아도 의심할 줄 모르는 풋풋한 새내기 대학생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홀린 듯 봉고차에 앉아 귀를 쫑긋하고, 어느새 집 주소를 적고 있었다. 정신 차려보니 자취방으로 1989년 초판 『파인트리 세계문학전집』 열 권이 배달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익만을 위한 사기 행각 안에서 벌어진 판매였을까. 눈먼 자의 팔랑귀로 인한 구매였을까. 나에게는 ‘문학’만 보였다. 나의 마음을 너무 많이 보여줬나.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전문대학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나는 ‘디자이너’를 모집한다는 회사에 들어갔다. 사무실은 단독주택 2층, 드르륵드르륵 아침부터 인쇄물 뽑는 소리가 들린다. 자동차 DM 발송 업체였다. DM을 편집하는 작업자는 한 명 있었다. A4 한 장 흑백 안내지는 혼자 작업해도 충분했다. 뭘 배운다고 하기에는 소박한 작업환경이었다. 나는 인쇄물을 접고, 봉투에 주소 라벨을 붙이고, DM을 발송하러 우체국에 다녔다. 나를 왜 뽑은 건지 사장에게 묻지 않았다. 12시가 되면 직원들이랑 차를 타고 야외로 나갔다. 논과 밭 풍경을 지나 사장 어머니 댁에 도착하면 진수성찬 밥상이 차려있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가족처럼 밥을 먹었다. 디자인은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만 숨통 트였다.
1990년대 초반, 지역마다 생활정보신문을 발행하는 회사가 우후죽순 생겼다. 나는 세 곳을 다녔다. 처음 들어간 곳에서 분명 편집디자이너로 입사했는데, 영업사원들과 조를 짜서 인근 시계점으로 수은전지를 받으러 다니는 일을 병행했다. 점점 신문을 만드는 일보다 다른 지역으로 출장 가는 날이 잦아졌다. 이상했다. 월급이 필요했다. 입도 잘 트이지 않는 나는 ‘저기요, 수은전지 받으러 왔는데요.’ 이런이런. 쭈뼛쭈뼛. 엉거주춤. 우물쭈물. 어느 것 하나 내 몸 같지 않아 다음 일터를 마련해 놓고 조용히 나왔다.
인쇄업에서는 매킨토시가 등장했다. 소규모 광고사에 학원비 명목으로 5만 원을 지급하고, 잡다한 일을 하며 틈나는 대로 DTP를 배웠다.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게 된 나는 인쇄 전 단계를 작업하는 정판사에 취직했다. 견습생으로 들어간 나는 첫 급여 20만 원을 받았다. 직원이 둘이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여자였다. 식자 치던 숙련이 느껴지는 나보다 나이 많은 직원,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는 나보다 어린 직원이 있었다. 나는 ‘새 컴퓨터’ 앞에 앉아 나이 어린 선배 가르침을 받으며 명함을 만들었다.
가장 먼저 출근하여 청소하고, 사모님이 차려준 점심을 먹고, 나는 본능적으로 설거지했다. 한 달에 한 번, 사장 부부와 직원들과 회식했다. 소규모 인쇄업 사장들은 직원 관리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석 달 지나 사장은 ‘나와 내 앞에 놓인 새 컴퓨터’를 다른 업체에 넘겼다. 사장은 아버지처럼 나를 달랬지만, 컴퓨터를 팔면서 나를 끼워 넘긴 건지, 나를 넘기면서 컴퓨터를 끼워 판 건지 생각할수록 분통 터졌다. 나는 결국 새 컴퓨터와 독수공방하는 새 직장으로 출근했다. 사장 부부는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거기까지. 아버지는 무슨.
새 직장에서 일이 없을 때마다 『아도브 일러스트레이터 3.0 활용』을 펴놓고 공부했다. 텍스트만 들어가는 인쇄물 작업은 재미가 없었다. 공부만 하면 뭐하나, 써먹을 일이 없는데. 하물며 대화를 나눌 동료도 없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늘지 않았다. 그즈음 엄마는 화상을 입었다.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은 엄마를 앞에 두고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네가 있어야지, 누가 있겠냐.’ 동생은 고등학생이었고, 오빠는 군대에 갔거나, 타지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당첨되었고, 간병 명목으로 독수공방했던 그곳을 뛰쳐나왔다. 새 사장 부부도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럼 뭐하나. 내 미래가 거기에 없는데.
두 번째 신문사에 입사했다. 컴퓨터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가 있는 내 책상, 부서를 나눌 만큼 규모 있는 회사, 파티션 위에 ‘편집부’ 표지판이 있다. QuarkXPress 프로그램으로 편집한 파일을 인쇄소로 넘기면, 다음날 내가 만든 신문이 나왔다. 그리고 월급이 나왔다. 처음으로 4대 보험을 냈다. 월급은 9개월째부터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신문을 만들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 기름 떨어진 냉골 방안에서 겨울을 났다. 사명감 비슷한 것이 생겼지만, 다음부터는 월급이 나오지 않으면 바로 나오리라. 사명감은 무슨.
1995년 세 번째 들어간 신문사에서 15년 다녔다. 월급은 제때 나왔다. 승진도 제때 해냈다. 20~30대 청춘이 다 가고, 회사가 이사할 때마다 그 곁으로 자취방을 옮기고, 삶의 1순위에 직장을 둔 일상이었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내 직업윤리가 초라해질 때, 더 이상 회사를 믿고 싶지 않을 때,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을 때 사직서를 제출했다. 여러 차례 면담했다.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만두냐고. 누구도 나의 사직 이유를 타당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서는.
몸에 체화된 배신의 기억들 덕에 나는 뭘 잘 믿지 않는다. 사람과 빨리 사귀지 않는다. 사랑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 사상에 쉽사리 몰두하지 않는다. 20년 전 ‘마을’이 비혼모임을 제안했을 때 반신반의했다. 그전 영화모임을 마지막까지 함께 참여했던 ‘마을’의 성실을 믿었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비혼이, 페미니즘이, 공동체가 내 삶의 정치적 신념은 아니었다. 신념을 위해 비비와 함께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나야 알 수 있는 것, 내가 선택한 삶의 양식은 자연스레 비혼여성공동체 모습을 갖춰갔다.
지속가능한 공동체 조건을 신뢰라고 말하지만, 정작 신뢰의 형체를 보여줄 수 없다. 형체도 없는 신뢰 속에 차곡차곡, 켜켜이 쌓아온 실천의 시간만이 있을 뿐. 그 시간을 함께 겪어온 사람만이 있을 뿐. 다만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그것에 임하는 나의 태도, 나의 마음을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전달하려는 노력, 내가 상대방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신뢰는 상호적이어야만 가능했다. 전하지 않는 마음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15년 활동한 여성 가수 듀오는 비법처럼 말했다. 서로에게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처음부터 15년을 함께 활동하라 정해놓았으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만 앞으로 다시 15년을 함께 활동하라 하면 그것은 할 수 있어요. 경험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