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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혜 Nov 11. 2024

두려움으로 가둬 버린 불빛

신호등 아래서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염증 수치가 50 이내가 정상인데 몇 배나 높은 384로 나왔어요.

이른 시일 안에 내시경 검사를 받아봐야겠습니다."


아침 8시. 비상벨처럼 울린 가족의 휴대전화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천천히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순간 마주친 가족의 눈동자에 담겼던 따듯한 햇살이 굴절되어 파랗게 오그라들고 있었다. 편안하게 맞이했던 아침이 깨진 얼음조각처럼 차갑게 부서졌다.


갑자기 오한이 들고 몸 안의 모든 장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팔뚝이 저리고 아팠다. 가족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심장 뛸 만큼 걱정됐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마침 내시경 검사를 하기로 한 날이어서 서둘러 준비하고 따라나섰다.


내 안에 있는 생각이란 녀석은 성급해서 뛰어가듯이 벌써 저만치에 가 있었다. 내시경 하기 전이고, 결과는 아직 그 뒤에 있는데 별안간 걱정의 늪에 빠져서 꼼짝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대장 내시경을 마치고 나오는 가족의 얼굴은 창백하고 힘없어 보였다. 가득 찬 회색빛 그림자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요즘 들어 핼쑥해 보이는 얼굴은 희끗해진 귀밑 머리카락을 염색하지 않은 탓이라 여겼다. 몸이 말라 보인다는 지인들의 말에는 30대부터 변함없는 체중이라며 변명하듯 말했고 그렇게 생각했다. 


특별한 이상 증세를 감지하지 못한 탓에 가족이나 나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진작 세심한 관심과 배려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한없이 아쉬웠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마음들이 우후죽순처럼 뾰족하며 올라왔다. 서둘러 걸음걸이를 옮기는 간호사의 표정과 발걸음을 살피는 나 자신이 갑자기 슬펐다.


예상대로 혹의 크기는 조직 검사 결과 전이라 해도, 사진 속에는 암으로 단정할 만큼의 크기로 선명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왔다. 며칠 후에 받아 든 단순 염증이라는 조직 검사 결과조차도 절대 인정할 수 없으며, 암이라고 확신하는 의사의 단호한 말투에 이미 겁에 질려있었다. 한 가닥 희망이 두려움과 공포의 절벽 끝으로 내몰려지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였을까.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내시경 검사를 한 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지극히 절제된 음식 섭취량과 탁한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음주와 흡연도 하지 않는다. 깔끔 맞은 성격이긴 해도 신경질적이거나 크게 스트레스받는 성향도 아니다.


가볍게 건강검진을 받고자 했을 뿐, 약간의 이상 징후가 발견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정말 중증 암이라면, 그 당시 깨끗했던 상태가 이렇게 짧은 기간에 항암치료를 병행해야 할 만큼 급속도로 나빠질 수 있을까. 내가 던진 질문에 의사의 답변은 간단했다. 

“요즘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자주 검사받아 봐야 하는 수밖에요.”



Andy Holmes


'빨간 불이 점멸등으로 변해가는 시간. 

걸음을 한참 앞서간 생각으로 인해 생겨난 두드러기를 보며 걸음을 멈춰본다.'

이솔로몬-<그 책의 더운 표지가 좋았다-신호등>에서 옮김.


그 흔한 가로등 한 점 없는 까만 밤. 한적한 삼거리 도로 위에 서 있다. 깜박이는 빨간 점멸등만이 생멸(生滅)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그랬다. 나 역시 걸음보다 앞서간 생각들로 빨강 신호등 경계선 앞에 서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곧 녹색 신호등이 희망처럼 다가와도 어디로 가야 이 두려움을 대처하고 벗어날 수 있을까. 신호 대기를 밟아야만 파란불로 바뀌는 상황으로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모든 시간이 만일이라는 가정 속에 묶여 가족은 중증 환자로, 나는 힘없는 보호자로 자신을 스스로 빨강 신호등 안에 가두었다.


가족은 의외로 밝고 태연한 모습이 왠지 억지스럽게 느껴졌지만 한 편으론 고맙기도 측은하기도 했다.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 빠르게 찾아올 거로 생각지 못한 이 상황이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힘없이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곧 고꾸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가족은 반짝거리는 얼굴로 애써 웃고 있었다.


분명한 원인도 치료법도 존재하지 않는 두드러기처럼, 정보가 파악되지 않은 돌출된 혹은 여러 번의 검사를 거쳤다. 심각한 중증만 아니라면 나는 가족과 함께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그 못난 돌출된 혹은 원인불명이며 아직 추적 중이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 씨앗을 얻었다. 




조심스럽게 한 가닥 희망을 믿으며 더디게 가던 한 달이 흘렀다. 며칠 후면 검사하는 날. 햇살 같은 좋은 소식을 믿고 있다. 어쩔 수 없다면 두려움으로 가둬버린 빨간 불빛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상처로 극복할 수 있는 노랑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다. 


태연한 척해도 남모를 상심과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을 가족의 손을 잡으며 진심을 건넸다.

“이것이 인연이라면 남보다 조금 더 빨리 왔을 뿐이니까 우리 받아들여요.”

“방법을 찾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만 생각하자. 이겨낼 수 있어. 이겨낼 수 없으면 친구하고 가지 뭐. 

힘내요.”

“지금까지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앞으로는 내가 더 잘해줄게. 믿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반복되는 신호등처럼 기다리면 파란불이 내게도 다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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