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내가 가을을 닮은 건지 가을이 나를 닮은 건지 가을이 깊어지듯이 나도 그렇게 익어 간다. 가로수 산책길을 걷다 보면 하나둘씩 떨어지는 낙엽으로 내가 가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방법이다. 아마 내가 가을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제법 노랗게 물든 낙엽 하나가 툭 떨어지더니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거리마다 온통 붉게 쏟아져 뒹굴다 쌓여간다. 이젠 그 빛도 서서히 잃고 꾹꾹 밟고 지나가는 자국만 그 위에 남는다.
마침, 종일 비가 내려 도로 바닥에 붙어 있는 젖은 낙엽의 모양새가 볼품은 없다. 그래도 한때는 붉게 반짝이는 빛으로 청춘이든 예순이든 가리지 않고 설렘과 낭만을 선물했던 다정한 순간이 있었으니 고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마저도 온전히 느끼기에 머물다 가는 가을이 너무 짧아서 아쉽다. 마치 지난 삶의 여정이 한순간에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감정과 비슷했다.
50대까지도 일이든 취미든 열정이 있으면 자신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만 맴돌았다. 소심하고 내향성이 강한 것이 문제였다.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어려웠다.
그런 것을 가까이서 눈여겨본 지인의 적극적인 권유로 처음 풍물놀이 패에 가입하고 장단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엔 사물놀이 장단을 머리로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동작을 하나하나 익히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과 어울려 흥겹게 장단 맞추고 어깨 춤추고 율동하는 것도 무척 부끄러웠다. 정말 어려웠던 것은 장구나 북의 장단보다 어색하고 부끄러운 그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이 내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일주일 동안 모든 장단을 익히고 집중해서 연습만 하면 될 정도로 사물놀이 장단에 빠져 버렸다. 신기했다. 나는 내 안에 흥겨운 끼가 없는 줄 알았다. 사물놀이 흥겨운 가락의 긴장감 있는 경쾌함이 소름 끼치도록 좋았다.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여러 가지 악기가 어울려 하나로 만들어 내는 소리가 한 가닥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내가 그 속에 어울려 함께 하는 것이 행복했다.
사물놀이의 장구, 북. 꽹과리, 징의 악기 하나하나가 사람의 목소리 기본 진동수와 가깝고, 우리의 가슴과 거의 일치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로 응답하는 듯한 친근함과 정다움을 느끼게 했다, 또 귀뿐만 아니라 피부를 통해 진동으로도 느끼게 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풍물놀이단의 봉사활동 등으로 여러 사람과 함께 하면서 그때까지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색소폰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자신감 회복과 적극적인 성향으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골의 정서에 비해 비교적 활동이 늘어나면서 드러내놓고 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소리 나지 않는 혼자 놀거리를 즐겼다. 한번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으로부터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럴 때 속으로 말했다. 원래 지금의 내가 예전의 나였다고. 단지 드러내 보일 줄 몰랐다고.
남편은 내가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덕분에 가까이 계시는 시부모님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도 취미나 종교 생활 등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팔순의 시어머니께서 조심스럽게 한 말씀 하셨다.
"야야, 여자가 악기 한다고 그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나?"
40년 전의 일이지만, 결혼하고 보름쯤 지나고 남편이 출근한 후였다. 혼인 신고하기 위해 말씀드리고 대문을 나서는데 새 새댁이 가 사람들 많이 드나드는 곳에 벌써 출입하는 게 아니라고 말리셨다. 뜻밖이었지만, 잘 말씀드리고 다녀오긴 했는데 그 당시 어머니의 성품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우셨던 것 같다.
어머니의 아버님은 전통적으로 선비시라고 들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내가 원해서 합가를 하고 몇 년 지냈지만, 보수적인 성품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러니 가까이에 사는 며느리가 까만 정장 차려입고 조명발 받으며 색소폰 동호회 활동하는 것이 못마땅해하셨다. 더군다나 남자 회원들이 있는 것도 낯설거나 망측스럽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행여 누군가 전해준 며느리 소식이 흉이 되지 않을까 염려도 하셨던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치 시부모님이 걸림돌이 된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 성품에 비해 배려심이 많은 분이어서 큰 어려움 없이 고부간은 좋았다.
그러나 열정이 많고 적극적인 데 반해 그런 염려를 불식시키기에 내 자신감은 대단하지 못했다. 스스로 울타리를 차고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
나를 돋보이게 할 이름을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평범한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사는 것이 익숙했다. 매일 행복했고 최고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는 동안 두 딸이 출가하고 손주들이 하나둘 태어났다. 선물처럼 온 손주들이 무엇보다 사랑스럽고 예뻤다. 꼬마들이 재잘거리고 우당탕하고 소란스러워도, 다투고 말썽부려도 이쁘지 않은 구석이 없다.
그러나 손주들에게 불리는 할머니라는 호칭이 사랑스럽게 들리는데 한편으로는 적응하고 싶지 않은 생각도 있었다. 분명 할머니가 맞는데 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빛바랜 젖은 낙엽처럼 왠지 쓸쓸함이 묻어났고 우울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고독할 때 글이 더 잘 써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쁘지만 슬펐고. 행복하지만 쓸쓸한 마음을 블로그 글로 옮기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쓰인 글마다 지금의 나는 없고 젊은 시절의 아쉬움만 가득했다. 무거웠다.
언젠가부터 그런 나로부터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졌다. 젊은 시절의 아쉬움은 이제 거두기로 했다. 지금의 예순의 내가 가족과 함께하는 이야기일 때 가장 가볍고 편했다. 예순이 즐겁다.
유별난 깔끔쟁이 가족과 틈만 나면 외갓집에 와서 추억 쌓게 하는 손주들과 그에 고군분투하는 예순의 내가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초보 할머니가 예순을 지나 느리게 익어가는 이야기를 브런치로 넋두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간절하게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