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무게
지나고 보니 생기가 안 났던 게 감기 후유증만이 아니었다. 가족의 내시경 재검사를 앞두고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지난 2월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 조직 검사 결과는 높은 수치의 염증이었다. 그런데 의사의 사진 판독은 경험상 검사 결과가 분명히 잘못된 것 같으니 대학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의사의 말은 분명하고 단호했다. 지금까지 경험상 혹의 모양이나 크기를 봐서는 악성종양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소견이었다.
가족은 결과 보기 전엔 걱정 없는 소년처럼 천진난만해 보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초라하게 바뀌었다. 태연한 척해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에서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여기서부터 이미 기절할 것 같았다. 병원 문만 다가서도 심장이 콩닥거리고 무서운데 뜬금없이 대학병원이라니. 아니 당사자보다 내가 죽을 거 같았다.
더군다나 대학병원마다 의료 대란이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진료 예약 날짜는 두 달을 기다려야 했다. 걱정 속에 두 달은 참 힘들다. 위기였다. 그렇지만 위기에 강한 사람은 기회는 반드시 있다.
우여곡절 끝에 상급병원 교수님과 1차 면담을 했다. 지역병원의 1차 내시경검사 영상 자료에 의하면, 혹의 크기와 모양을 봐서는 악성종양으로 속단하긴 어렵다고 했다. 그 이유는 혹의 돌출 모양과 부위가 기존의 악성종양과 다르고, 지금까지 그런 종류의 혹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로선 정보가 없는 혹을 당장 제거 수술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악성은 아닐 수도 있다고 안심시킬 만한 소견도 넌지시 건넸다. 덧붙여서 1차 병원에서는, 만일의 가능성을 대비해 긴장감을 놓지 않게 최악의 소견을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교수님의 친절한 미소에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했다. 1차 진료병원에서 악성종양이라며 새파랗게 쏘아대던 말투에, 얼어붙었던 마음도 조금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시간을 두고 관찰하며 혹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했다.
한 달 만에 검사한 내시경 검사 결과, 대장암 3기로 예상했던 원인 불명의 종양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내가 봐도 종양처럼 생긴 혹이 어떻게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지 정말 신기했다.
내시경 검사 전에 대학병원 교수님께서
"혹이 없으니 조직 검사도 할 수 없겠죠? 어쨌든 암이 아니니까 결과는 좋은 겁니다."
"6개월 후에 내시경 검사 다시 하고 최종 진단 결과를 내리겠습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검사 날짜가 가까워져서 달력 뒷장에 음식 조절 안내와 약 복용 방법을 잘 보이도록 큰 글씨로 써서 안방 문에 붙였다.
3일 전부터 흰쌀밥과 맑은국과 달걀, 생선으로만 먹고, 전날은 흰죽과 금식으로 이어지는 동안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역시 밥심이다. 밥을 일부러 굶긴 것도 아니고 건강하기 위해 검사하는 것이고, 검사하려면 안 먹어야 하고 이미 먹은 것도 비워야 하는 걸 알면서 예민해진다.
물로 배를 채우고 또 비우고, 노랗게 기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두고 덩달아 입맛이 없어서 같이 굶게 되었다. 그런 데다가 걱정까지 보태고 있어서 지켜보는 보호자인 나도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었다. 지역 병원 내시경 결과의 커다란 종양 사진이 휴대전화에 아직 남아있다. 재검 결과 종양이 있던 자리에 희미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을 확인했지만 믿기지 않았다.
처음 검사할 당시 결과를 두고 의사가 했던 단호한 말들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혹시 안 좋은 결과로 반전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컸었다.
내시경실로 들어간 가족이 지난번과 달리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고 나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믿고 싶었을 뿐이다.
얼마 후, 결과는 역시 깨끗하고 회복 중에 있다는 간호사의 친절한 귀띔이 쓸데없는 걱정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 내 몸이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 같았다. 생각 하나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이 이렇게 가벼울 줄이야.
사라지는 것이 때론 불가사의하다. 내가 보았던 혹의 정체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했던 쓸데없는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떻게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히 좋은 건 맞다.
며칠 동안 속 비우느라 애쓴 가족이 죽을 천천히 한 숟가락씩 떠먹고 있다.
그 모습이
참
이쁘다.
지난 6개월의 시간이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