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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남편이 항암 치료를 시작합니다

by 마리혜

불그레 잘 읽은 왕자두가 흡사 사춘기 소녀 볼 같아요. 보고만 있어도 입안에 침이 가득 고입니다. 자두 특유의 신맛보다 듬직한 맛이 느껴지고요. 예전에는 자두처럼 신맛이 나는 과일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사돈(작은 딸) 댁에서 보내주시는 자두를 먹고 선입견이 무너졌습니다. 한 잎 덥석 깨물어 먹기에도 예의가 아닌 맛이에요.


제철이 아닌데 방금 딴 것처럼 싱싱하고 단단합니다. 함께 보내주신 복숭아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볼을 감싸듯 하나하나 포장된 복숭아 표정도 귀엽도록 신선합니다. 이렇게 제철 맛으로 즐길 수 있는 것도 과수 농원을 하시는 사돈이 계시니 가능합니다. 늘 감사하지요.


맛있고 좋은 것은 역시 나누어 먹는 것이 제맛입니다. 여러 가지 과일이 풍성할 때는 나눔 하기 좋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에요. 명절이면 양가 사돈께서 보내주신 덕분이죠. 그 덕분에 생색을 내는 편입니다.


어제저녁에 도착한 큰딸이 어른 덩치만 한 배와 샤인머스캣을 보탭니다. 또 굴비 세트를 보는 순간 이랑이(작은 딸 손자) 얼굴이 스쳐 갑니다. 초등 입학 전에는 엄청 잘 먹는 서진이(큰딸 손자) 입맛과 비교되던 손자예요.


잘 먹지 않아서 자기 엄마 애간장을 무척 애태우던 아이였지요. 그때 유일하게 아이 입맛을 자극했던 것이 굴비랍니다. 저의 머릿속에 자동 입력된 굴비는 이랑이를 떠올리게 하는 생선입니다.




서두가 길어져서 선물 자랑처럼 돼버렸습니다. 이렇듯 평소에 생각하는 것처럼 손이 덥석 가지 않는 것이 명절에는 흔해집니다. 그럴 때 누구라도 나누고 싶을 겁니다. 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를 겁니다.


이번에 저는 마음이 평소와 다릅니다. 애틋하고 더 특별해요. 가족처럼 여기고 있는 오랜 친구가 먼저 떠오르니까요. 그것도 멀리 있지 않아요. 길 건너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살고 있어요.


그녀와 저는 42년째 친구예요. 한 동네 길 건너에 산 지도 어언 33년째 되었고요. 그 친구의 얼굴을 보면 인생이 보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지지요.


아플 때 먼저 달려와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아플 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 있거든요. 자신이 맥없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마음을 어루만져 줄 친구라고 생각해 주는 친구를 오히려 저는 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참 동안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미루던 약속이었습니다. 추석 전날, 늘 했던 것처럼 밥 먹고 분위기 좋은 이화령 카페에 앉아서 그간의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그녀의 미소는 변함없이 밝았습니다. 밝은 미소에 감춰진 무거운 소식을 눈치채지 못한 저는 바보였네요.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고 오열하는 친구를 보는 순간 영문도 모르고 눈물만 흘렸죠.




친구 남편이 아파요. 추석 연휴 마지막 일요일이 항암 치료일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녀에게조차 3개월을 숨겼어요. 그러는 동안 암세포는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항암까지 가지 않아도 될 일을 자처한 셈입니다. 친구들과 잦은 술자리. 수십 년 애를 써도 해결하지 못한 흡연. 암의 원인이 될 수도 있었고 가벼운 치료를 항암 치료까지 가게 된 원인이 된 거겠지요.


그보다 건강을 염려하고 시작될 아내의 잔소리를 견디는 것이 더 어려웠을까요. 두 아이를 출가시키고 4개월 된 친손자의 재롱이 한창입니다.


그녀는 휴 하고 이제 넉넉한 마음으로 보내야 할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긴 기분일 겁니다. 주어진 인생이 그런 건가 봅니다.


일요일은 많은 사람들이 추석에 가족과 행복하게 보내고 돌아가는 마침표를 찍는 날. 친구 남편은 항암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시각이 누군가 시작하고, 누군가는 마무리하는 시점이겠지요. 항암 치료는 힘든 고통을 안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힘든 고통은 그래도 희망으로 연결되는 고리가 분명 있을 겁니다. 고통과 가는 길이 아니라 암과 타협하며 사이좋게 치료해 나가는 것이 희망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렵지만 좋은 생각도 치료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싱싱한 자두, 배, 복숭아, 샤인머스캣, 굴비 몇 마리.

예쁘게 포장된 과일과 굴비 세트를 보면서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주섬주섬 종이 가방에 담아 놓았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 친구를 만나러 그녀의 집으로 갑니다.


그녀의 처진 어깨에 조금이라도 힘을 넣어 주고 싶습니다. 희망이 있으니까 잘 견디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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