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내가 나를 보는 방식 (자기 인식) (4)
나는 이미 나를 정의하는 낱말들을 써왔다.
중구난방, 그때그때 스쳐가는 상념 같았지만 모두가 반짝거렸다. 그러나 모두가 반짝거리다 보니 그 어떤 것도 반짝이지 않게 되었다는 역설이다. '애초에 모든 것은 빛나지 않았다'는 초월적인 생각은 이런 고민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말이다.
낱말들은 나를 설명하는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했다. 어떤 낱말은 나를 자유롭게 했고, 어떤 낱말은 나를 구속했다. ‘철없음’이라는 낱말은 나를 가볍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래서 '박영감'이라는 낱말로 좀 눌러줬다는 느낌에서 마음에 드는 필명이다. ‘연구자’라는 낱말은 나를 탐구하는 존재로 세웠지만, 때로는 끝없는 의심 속에 빠지게 했다. ‘웃음’은 나를 밝게 했지만, 그 뒤에는 그림자가 따라왔다.
나는 낱말들을 통해 나를 다시 세운다고 생각했다. 떠올려서 반성하고 고쳐서 다시 세운다. 낱말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이름, 별명, 스스로 붙인 단어들이 모여 나를 만든다. 낱말들은 나의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나는 나를 바라보고, 다시 의심하며, 또다시 정의한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낱말들은 반짝이지만, 그 반짝임은 순간이다. '그 순간들이 모여 나의 서사를 만든다. 나는 그 서사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찬란한 말들은 전부 헛소리다. 낱말은 낱말의 정체성이 있고, 나는 나의 정체성이 있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묻는다. 나는 어떤 낱말로 끝내 설명될 수 있을까, 혹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을까. 다 헛소리라고 느껴진 이유도 그것도 '나'고, 이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나', '현재의 나'가 다른 사람인가? 개과천선하여 다시 태어났나? 그렇게 하면 모순은 사라지는가?
낱말을 가만히 보다 보면 그 말 만듦새에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다. 형태소라고 하나? 어떻게 저런 이마를 탁 칠만한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아름답다'의 '아름'은 '나'라고 한다. 학술적 배경이 허구라는 말도 있는데, 그래서 아름답다는 말은 '나답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학술적 사실관계는 뒤로 미루더라도 말 자체가 주는 울림이 크다. '울림'도 그렇다. '울다'의 피동사 '울리다'에서 명사형으로 바뀐 낱말이겠지? '울다'는 복수의 뜻을 갖고 있다. 눈물을 흘리다. 소리 내어 진동을 퍼트리다. 쭈글쭈글 해진 모양... 등등. 특히 마지막 쭈글쭈글해진 모양은 소리의 파형을 계산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선조들의 천재성?이라는 국뽕 가득한 쇼츠가 어딘가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추정이다.
낱말의 속뜻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나'를 정의하는데 감히 '낱말'을 써도 될까?'라는 겸손함이 먼저 든다. '나'를 정의하는데, 감히 '낱말'을 욕되게 하지 말자. 인간의 모순을 표현하는 지표로 '낱말'을 사용하지 말자. 지표는 하면 안 되는 것을 해도 괜찮은 것으로 바꿀 수 있다. 흔히 식단을 한다고 할 때, 칼로리로 환산해서 관리를 하는데... 누가 그러더라 칼로리 계산법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닌데, 섭취량을 칼로리로 계산하면 먹으면 안 될 것도 먹어도 괜찮은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고... 나를 정의하는 낱말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다이어트할 때 칼로리를 계산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