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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공채시험 : 갑자기 훅 들어온 변성연기

애니메이션 캐릭터 분석, 연습, 연기

by 철없는박영감

성우 지망생의 최종목표는 방송국공채성우가 되는 것이다. 보통 2~3년의 전속기간을 거쳐서 FA시장에 나오게 된다. 방송국공채성우가 되면 한국성우협회의 회원이 된다. 그래서 협회성우라고도 한다. 이것은 나중에 비협회성우와 비교하기 위해 쓰는 용어일 뿐이고, 우리가 보통 직업으로 생각하는 '성우'는 전부 협회성우님들을 가리킨다. 학원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선생님들이 모두 협회성우님들 이시다. 방송국공채출신이 아니면서 성우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특히 광고계에 많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분이 예전 코요테 멤버였던 김구 님이다. 아마 목소리 들어보면 '아! 이 사람' 할 거다. 성우협회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비협회성우라고 하고, 예전에는 '언더성우'라는 말도 썼는데, 스스로 낮추는 호칭은 쓰지 말자고 해서 지금은 안 쓰는 용어다. 가수들 중에 언더그라운드 가수라는 말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즉 비협회성우들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생각하면 된다. 개인 녹음실이나, 요즘은 재능마켓 플랫폼들이 많아서 그쪽을 통해서 일을 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길 것이다. 왜 굳이 비협회성우도 있는데 협회성우가 되려고 하느냐. 간단히 말해서 협회성우는 프로페셔널이고, 비협회성우는 아마추어이다. 비협회성우는 성우지망생들 중에 아직 공채합격은 못했지만 실력이 좀 되는 사람들이 아르바이트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하늘이 두쪽 나도 성우님들이 비협회성우와 같이 일하는 경우는 없다. 간혹 애니메이션에서 아역들이나 마케팅의 일환으로 연예인들과 같이 하는 특별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홍보 수단이다. 한 때 개그맨 박영진 님이 개콘에서 성우님들 외화더빙을 '화면과 입이 따로 노는 것...'이라고 개그를 쳤다가 희극인협회 회장이었던 엄용수 님이 성우협회에 와서 사과했던 적이 있다. 개그맨들도 애니메이션 더빙으로 수입을 올리던 시절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고 그 뒤로 '쾌걸 조로리' 극장판에서 주인공 성우님이 있는데도 연예인으로 배역이 바뀌어서 논란이 있은 후 그런 마케팅이나 영화 홍보는 이제 안 보이는 것 같다. 페이도 엄청나게 차이 난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안돼봐서 모른다. 엄청나게 차이 난다는 것만 안다. 어쨌든 프로페셔널 직업으로써 '성우'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방송국공채성우가 유일한 방법이다.


비협회성우들은 요즘이 가장 위기의식을 느끼는 시기일 것이다. TTS (text-to-speech)가 나날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짧은 지방라디오 광고, 기업소개자료, 학습교재녹음, 버스음성광고 등이 주 일감인데, TTS가 발전하면 할수록 일감이 줄어들 것이다. 만약 성우공부를 하다가 안되면 비협회성우로 일할 계획을 짜고 있는 성우지망생이라면 당장 계획을 수정하기 바란다. TTS는 이 프로그램으로 퇴고를 많이 해서 작가님들도 많이 써봤을 것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TTS 안 쓴다. 일주일간 쓴 글을 주말에 몰아서 읽어보며 최종 퇴고를 한다. 읽어보면서 말로 했을 때 어색한 부분은 수정한다. 그리고 지난주부터 내 팟캐스트에 한편씩 올리고 있다. 나중에 혹~옥시나 내 책이 만들어진다면 내가 직접 녹음하고 싶은 바람도 있다. 그런데 지난주에 겨우 10분짜리 녹음하는데도 힘들더라. 너무 오래 쉬었다. 뱃심도 부족하고, 목소리도 떨리고, 발음은 입이 잘 안 움직인다. ‘하다 보면 또 늘겠지’라는 생각으로 비전문가 느낌으로 계속해볼 계획이다.


방송국은 현재 공중파는 KBS와 EBS만 공채성우를 뽑는다. 나머지는 케이블채널의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이다. 공채모집은 대략 [표-1]과 같이 선발된다.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MBC는 과거 외화부에서 성우극회를 운영했으나, 외화더빙이 사라진 지금은 공채를 뽑지 않는다. 20년도 더 됐으니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SBS는 처음부터 성우극회가 없었다. KBS는 성우극회가 라디오국에 소속되어 있어서 계속 공채모집을 하고 있다. KBS공채는 성우지망생에게 연중 가장 큰 시험기회이다. KBS와 EBS를 공기업이라고 하면, 투니버스는 CJ ENM 소속으로 대기업, 대원방송은 중견기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고, 대교방송은 사실 우리 때는 응시 안 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 성우활동뿐만 아니라 리포터 활동도 해야 한다는 풍문을 들었을 뿐이다. 모두 음성 시험이 기본이고, 투니버스와 대교방송은 카메라 테스트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원방송은 프로필 사진제출을 요구해서 스튜디오로 사진 찍으러 많이들 다녔다. 나도 미용실 가서 메이크업하고, 머리 하고, 옷도 새로 사서 사진 여러 번 찍었다. 포토샵의 위대함을 저 때 알았다.

[표-1] 방송국 별 전속성우모집 정보

내가 공부할 때만 해도 KBS는 1차 시험부터 현장, 즉 방송국에 와서 직접시험을 치고, 나머지 방송국은 음성녹음파일 제출이었는데, 코로나 이후 전부 녹음파일 제출로 바뀌었다. KBS시험과 관련해서는 나중에 따로 에피소드를 쓰려고 한다. 1차부터 현장시험을 치다 보니까 온갖 특이한 사람이 다 모였다. 지금은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지만... 정확한 집계는 없으나 성우지망생 수는 전국에 3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예전 KBS시험 접수현황을 보면 남자가 1~19999까지 수험번호를 썼고, 여자가 20000~59999까지 썼던 것 같다. 1년에 대략 5~6만 명이 접수하는데 허수가 많으므로 적어도 3만 명 이상의 지망생이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에서 30명 안에 들어야 공채가 될 수 있다는 셈이 나온다. 그것도 매년 모집하는 곳은 KBS와 대원방송밖에 없다. 얼마나 바늘구멍인지 감이 올 것이다. 실력이 좋아도 1차에서부터 걸러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성우공채가 이렇게 바늘구멍인지 알면서도 지망생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포기하기 않고 계속 도전한다. 그러므로 장기전을 꼭 염두에 두고 성우지망생의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내가 계속 '금욕주의 생활' 노래를 부르는 거다.


어쨌든 이런 공채시험이 기초반 수료도 못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쳤다. 대원방송 전속성우 공채다. 매년 시험이 있는 방송국으로 애니메이션 전문채널이고, 아마도 지금 '슬램덩크'로 대박 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슬램덩크 만화책 국내판권이 대원에 있을 거다. 작년 2022년도가 공채 13기인가, 14기인가 그랬으니까 내가 공부하던 10년 전에는 그렇게 역사가 깊은 성우극회는 아니었다. 지금 가장 유명한 대원성우극회 출신 성우는 서유리 성우님일 거다. 몇 년 전 '마리텔'에서 맹활약했던... 지금은 라디오 방송도 진행하면서 방송인으로도 활동하는 것 같다. 대원방송은 매년 공채를 모집하는 방송국이어서 이곳의 모집공고가 뜨면 학원은 전부 공채시험대비모드로 바뀐다. 모든 반이 진행 중이던 과정은 잠시 중단하고 공채시험대본 분석을 시작으로 녹음, 편집, 프로필사진촬영 등 방송국에서 요구하는 제출서류와 파일을 준비한다. 편집이라고 해서 녹음파일에 효과를 넣거나 기계적으로 수정을 하게 되면 탈락 처리된다. 편집은 자르고 붙이는 정도만 허용된다.


우리 반도 기초반이지만 경험상 지원하기로 했다. 나중에 내가 고인 물일 때 진짜 유명하시고 강의도 잘 안 하시기로 유명한 성우님이 삼고초려 끝에 반을 맡으셨는데, 학원 연례행사 같은 대원 시험에 본인의 반학생들은 수준미달이라서 응시시킬 수 없다고 하셔서 난리 났던 적이 있다. 수강생들도, 원장님도 모두 멘붕이었다. 어떻게 해결됐는지는 듣지 못했다. 대원방송공채시험문제는 애니메이션 전문채널답게 전부 연령대와 성격이 달랐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우님들의 변성 스킬 시전이 필요한 대본들이었다. 1번은 5세 쾌활한 남아, 2번은 10대 열혈 소년, 3번은 20대 냉철한 미소년, 4번은 중후한 중장년, 5번은 괴물 악당. 이런 식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채시험도 당황스러운데 변성에, 연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최근에야 열 번 가까이 응시를 하니 요령이 생겨서 한 시간이면 녹음파일 정도는 집에서도 가뿐히 준비를 하지만 기초반 때는 앞에서 말한 대본분석, 상황 및 배경 설정, 서브텍스트 찾고, 이제는 캐릭터까지 연구해야 해서 진짜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선생님이 디렉팅 해주시는 그대로 따라 했던 것 같다. 물론 디렉팅대로 할 수 있는 실력도 아니었으니, 못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채시험문제가 출제되면 성우지망생 카페에는 각 문항별 영상이 돌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건 참고사항일 뿐이다. 각자 상상해서 대사의 내용과 상상한 상황이 맞아떨어지기만하면 된다. 아니면 대사와 다르게 서브텍스트를 넣어서 연기로 들키면 된다. (성우 연기에 대해서는 예전글 '단지 칭찬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에서 한 번 쓴 적이 있다.) 대부분의 지망생들이 시험문제가 출제된 장면을 보고 준비하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설정이 비슷할 것이다. 녹음당사자는 디테일하게 설정했겠지만 본인의 의도를 100% 연기로 표현하는 것은 송강호 배우님이 와도 못한다. 따라서 심사위원은 비슷비슷하게 들리는 여러 파일 중에 몇 개를 골라내야 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획기적인 설정으로 튀게 만들면 어떨까 생각할 수 있는데 '모 아니면 도'일 것이다. 만약 그 정도 설정능력이면 작가를 하는 게 더 나을지도...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게 인사다. 위의 대본을 보면 알겠지만 인사 예시까지 있다. 직접 심사위원의 이야기를 들어 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인사만 듣고도 잘하는 애인지, 못하는 애인지 구분이 된다고 한다. 인사가 매력 없으면 연기는 들어볼 필요도 없이 '다음 기회에'가 선언될 확률이 크다는 말이다. 처음 응시할 때 인사 때문에 엄청나게 고생했는데 백 번은 한 것 같다. 멋있는 인사가 안 돼서... 성우 같은 세련된 인사가 안 돼서... 결국 실장님이 내 인사를 듣고 '성시경 같이 좀 해봐요'라고 마지막에 짜증 아닌 짜증을 내셨다.


어쨌든 녹음된 결과물을 MP3파일로 만들어서 메일로 이력서와 함께 제출하면 지원은 끝이다. 이 때는 선생님들이 극한직업으로 바뀐다. 실력도 안 되는 지망생들을 어떻게든 성우 한 번 만들어 보시겠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지도해 주신다. 나 같은 경우 고인 물 시절에 선생님이 진짜 합격 한번 시켜보겠다고, 되는대로 마구 녹음해서 선생님께 보내드린 파일을 들으시고 여기저기서 잘한 부분만 섞어서 프랑켄슈타인 같은 결과물을 만들었더랬다. 그러고도 떨어졌으니... 그다음부터는 선생님도 너무 힘드셨는지 그렇게는 안 해주겠다고 선언하셨을 정도였다. 잘한 거 몇 개 보내면 그중에 선택만 해주겠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으셨었다. 공채시험기간 때는 여러 개인녹음실도 만원이다. 스케줄 잘 짜서 준비해야 한다. 학원녹음실을 사용할 수 있으면 돈도 안 들고, 시설도 좋아서 고퀄리티의 파일을 뽑을 수 있겠고, 개인녹음실을 사용하면 시간당 금액이 책정되지만 엔지니어가 있어서 어느 정도 디렉팅도 해준다. 돈이 들뿐 고퀄의 파일을 뽑을 수 있다. 집에서 개인장비 꾸려서 하는 분들도 많다. 나도 집에서 몇 번 했는데... 그때는 진짜 층간소음 들리면 당장 쫓아 올라가고 싶다. 그런데 집에서 혹은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는 것은 비추천이다. 소리도 지를 수 없고, 음질도 나쁘고, 특히 반사음이라고 벽에 부딪혀서 반사되어 온 소리가 마이크에 들어가서 에코가 조금 생긴다. 집에서는 아무리 시설을 좋게 해도 방음부스를 설치하지 않는 이상 스튜디오 같은 퀄리티가 나올 수 없다. 방음부스 알아봤는데 제일 싼 게 6백만 원이다.


기초반 때 응시한 파일을 들어보면 정말 웃음도 안 나온다. 선생님이 항상 소리가 납작하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정말 몰랐는데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기초반에서의 공채시험을 위한 변성연기는 할 말이 없다. 기억도 안 난다고 하고 싶다. 정말 경험 삼아해 봤다 정도이다. 저 파일을 제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불킥 만 번감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우리끼리는 서로 진짜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합격하면 어떡해 막 이랬는데, 왜 선생님이 스튜디오에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셨는지 이해가 된다. 그래도 연례행사 같은 대원방송 공채가 뜨면 오래간만에 학원이 시끌시끌해진다. 마치 명절 대목처럼... 한동안 안 보이던 학원생들도 녹음하겠다고 슬쩍슬쩍 보이고, 여기저기서 대본연습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아... 그 시절이 왜 이렇게 그립냐...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데... 녹음실의 마이크 앞에 서서 두근거리며 호흡을 가다듬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때의 흥분을 다시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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