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많은 아기 고양이를 만난 강아지, 내 동료가 돼라 멍!
첫째 반려견 이공이가 오고 난 후로 우리 집은 화기애애 했다. 말귀를 어느 정도 알아듣는 이공이는 모든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매일 동네를 산책했고 복순이라는 동네 친구도 생겼다. (이공이가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다. 며칠 내내 홀로 떠돌던 새끼 고양이를 아빠가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아빠는 동물을 얻는 일에는 능숙했지만 돌보는 일에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이 새끼 고양이 또한 나와 엄마의 몫이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길고양이임에도 애교가 넘쳤던 새끼 고양이는 나의 고양이 알레르기마저도 이겨내게 만들었다. 우리 집 아래의 빈 상가에 임시 거주지를 마련했다.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던 아이는 눈이 특히 나빠 보였고 여기저기 털이 빠져있었다.
주먹밥 같은 무늬를 가진 고양이에게 '토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개와 고양이는 천적이라더니 본능적인 DNA가 토리에게도 장착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 보는 사람 무릎에 앉아 골골거리던 어린 고양이는 이공이를 보자마자 하악질을 해댔다.
인간만이 적응의 동물이 아니다. 아기 고양이 토리 또한 이 거대한 짐승(토리 기준에)에 익숙해졌는지 이공이를 봐도 하악질 하는 때가 줄었다. 새끼 고양이가 마냥 예쁜 이공이는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나도 모르는 새 가까워진 두 짐승은 서로 껴안고 있기도 하고 핥기도 하며 순진한 아이들처럼 장난질을 쳐댔다. 가끔 토리는 이공이의 통통한 꼬리를 잡아당기며 먼저 놀자고 조르기도 했다. 어린 생명을 기른다는 건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밥 먹는 것부터 안약을 챙기기,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점점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뽀얀 얼굴을 드러내는 모습은 자연의 신비 같았다. 눈도 점차 말똥해지고 갈비뼈가 드러나던 몸은 생기가 돌았다. 녹색 눈동자가 드러난 순간 고양이가 왜 영물이라 불리는지 알듯했다. 길들일 수 없는 야생성을 가진 동물이 길들여지기를 스스로 선택한 눈빛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은 나를 비롯해 모든 환경을 바뀌게 한다. 마당 앞 잔디밭에 누워 이공이와 놀던 토리. 마당 소나무에 올라타 경치를 즐기던 토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감쪽같이. 토리가 조금씩 자라며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저녁때 즈음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터라 늘 같은 하루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어도 토리가 보이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늦은 저녁 가족 모두 온 동네를 돌며 목이 터져라 토리를 불렀다. 어디선가 '야옹'하는 소리가 들려 앞 밭으로 달려가니 토리가 아닌 다른 새끼 고양이가 고추를 물고 있었다. 그때의 허무함이란.
토리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토리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럼에도 죽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저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것이라고 믿고 싶기도 했다. 그러기엔 아직 작은 새끼 고양이인데. 산짐승이나 다른 고양이에게 공격받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후에 우리 동네에 있는 사료가게에 가니 길고양이가 목줄에 묶여 누워있었다. 나는 사장님에게 길고양이도 길들일 수 있냐 물었다. 사장님은 하루 중 대부분은 목줄을 풀어주는데 그래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길고양이를 마당에서 기르고 싶으면 6개월 동안 목줄을 해서 기르면 후에 목줄을 풀어도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나와 가족들은 정말 고양이에 문외한이었다. 토리를 데려온 순간부터 상가에서만 길렀다면 성묘가 되어서도 집을 찾아오는 마당냥이가 되었을 텐데. 그 후로 가장 우울했던 것은 다름아닌 이공이었다.
이공이는 매일 심란한 표정으로 하루를 보냈고 어떤 일에도 기운이 없었다. 하루 아침에 매일을 함께 보낸 절친을 잃었는데 그 심정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토리가 떠난 후 곰팡이성 피부병인 '링웜'에 전염되었다. 토리가 남기고 간 전염병은 점점 범위를 넓혀 번졌고, 이공이의 얼굴은 얼룩덜룩 털이 빠지고 구멍이 났다. 동물병원에서는 인수공통 질병이니 개를 쓰다듬거나 같은 이불을 덮지 말 것을 권했다. (간식도 손으로 안주고 밀어서 줬다. 미안)
결국 내 팔에도 링웜이 옮았고, 이공이와 나는 지독한 곰팡이성 피부염에 시달렸다. 매주 약용 샴푸(약 성분이 들어간 강아지 샴푸)로 이공이를 씻겼고 그 결과 두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링웜에서 서서히 해방될 수 있었다. 피부병이 나은 것은 참 다행이었다. 이공이도 원래의 얼굴로 깨끗하게 돌아왔으니. 하지만 이공이의 마음만은 치유되지 않았다. 텅 빈 눈으로 누워만 있는 이공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장난감을 사주어도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이공이의 우울이 깊어지자 우리 가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 회의를 열었고, 주방 식탁에서 열린 회담은 둘째를 입양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무지로 토리를 떠나보냈던 경험에 이번에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싶었다. 다견 가정에 대해 공부했고 합사 방법과 서열 정리에 대한 지식을 배워나갔다. 특히 '둘째 입양 시 보호자가 해선 안 되는 행동' 등의 제목을 가진 영상이 무지를 채우는 데 좋은 양분이 되었다.
둘째를 어디서 입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우리 동네는 시골이지만 장으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했다. 장날이 되면 각지에서 방문객이 모여 북적거리고 한산했던 거리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라솔 행렬이 이어진다. 시골 장날에는 새끼 강아지나 꿩, 닭, 토끼를 팔기도 한다.
나와 언니는 장날을 맞아 시장 구경에 나왔고 거기서 노란 자재 박스 안에 들은 새끼 강아지 3마리를 마주했다. 아저씨 말로는 이미 2마리는 팔렸고 그나마 예쁜 애들로 얼른 데려가라 했다. 마리당 만원. 옆에는 다른 아줌마 무리가 열심히 개를 고르고 있었다. 우리가 물끄러미 강아지들을 바라보고 있자 아줌마는 조급함을 느꼈는지 그나마 귀여웠던 한 마리를 딱 집어 데려갔다.
나는 똑같이 구경꾼인 주제에 개의 앞날을 걱정했다. 아저씨가 거침없이 개 한 마리를 들어 올려 박스에 넣자 아줌마는 '살살해요'라고 했고 이상하게 그 말을 듣자 내 안의 걱정은 녹아 사라졌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오지랖쟁이인가 보다.
우리는 결국 개를 고르지 못했다. 대신 포인핸드라는 유기견 어플을 알게 되었고 내가 사는 지역에 매일 유기된 개들이 끝도 없이 밀려 들어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하나 공고를 살피던 중 의젓하게 생긴 멍멍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주인을 잃고 보호소에 들어왔음에도 당차게 웃고 있는 강아지. 그 모습이 나만 웃긴 것은 아니었는지 공고 게시글 댓글에도 많은 반응이 이어졌다. '너무 귀엽다', '정말 의젓하다' 등등. 나는 이 개를 데려오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개는 이미 성견이었고, 첫째 이공이는 성견 강아지보다 새끼 강아지를 훨씬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포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쓰여 몇 날 며칠 그 개가 입양을 갔는지 확인했고, 어느 날 '입양'이라는 문구가 개의 사진 옆에 뜬 것을 보고 편안해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유기견이 낳은 새끼 3마리가 포인핸드 공고에 주르르 올라왔다. 형제들은 앞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운명을 찾아 나가야 했다. 그중 유독 눈빛이 순한 아이가 있었다. 같은 누렁이라 자라면 첫째 이공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똑 닮은 두 마리 누렁이가 나란히 있는 상상을 했다.
우리는 시 보호소에 전화를 했고, 강아지를 볼 수 있냐고 물었다. 보호소는 내부를 볼 수는 없고, 입양을 결정하면 강아지를 준다고 했다. 입양을 결정하자 보호소와 연계된 수의사가 시보호소에 방문해 강아지에게 예방 주사를 맞혀주었다. '아이고 고놈 통통하네'라는 소리를 해대며. (이건 보호소의 빅피쳐였다)
박스에 담겨 집으로 오는 내내 꼼짝도 않는 강아지를 보며 너무 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합사를 위해 새끼 강아지를 상가에 내려둔 순간, 얇은 살가죽 뒤로 툭 튀어나온 갈비뼈가 만져졌다. 너무 말라서 순간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이 정말 살아있는 개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데리고 온 강아지는 상가 구석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머릿속에는 빅데이터로 쌓은 위험 경보가 울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