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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롱 Sep 01. 2023

겨울산

0. 제목 : 겨울산


1. 과거에는 오직 1년에 단 하루만 등산을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의미도 없었다.


2.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겨울에만 산을 올랐다. 그게 1년의 단 하루였다.


3. 겨울 산을 고른 이유는 땀이 나자마자 식어버리는 차가운 공기와의 접촉이 기분이 좋아서였다.


4. 냉기와의 접촉은 코끝에 흐르는 콧물도 얼려버리고 폐 깊숙한 곳으로 들락날락하는 공기를, 어느샌가 새하얀 수증기로 변모시키며, 고글을 뿌옇게 만들었다. 


5. 새빨갛게 변한 귀는, 나의 정신과 달리 몸은 추위에 고통받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6. 울퉁불퉁한 산길이 아닌 눈으로 평탄화가 진행된 산에 아이젠 자국을 남기며 한발자국씩 올랐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도화지 같은 바닥에 발자국 남기는 건 그 어떤 기분보다 행복했다.


7. 고글에 맺힌 서리를 닦으며, 눈 덮인 새하얀 산 능선을 보았을 때는, 나는 산에 올랐음을 깨달았다. 몸속 깊은 곳으로 해발 1,000m를 넘는 곳의 바람이 호흡기를 관통했다. 기분 좋은 냉기였다.


8. 1년 중 단 하루, 산을 오르는 길고 긴 시간은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기분의 시간이었다.


9. 그저 1년에 하루 정도. 평소 하지 않았던 것을 하고 싶었던 것. 그것이 등산이었다.


10.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11. 몇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영주에 있었다. 전날의 울릉도행은 폭설로 취소되었다. 내륙에는 비가 내렸다. 


12. 산을 오른 날이 크리스마스인 건 우연이었다.


13.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나는 소백에 갔다. 설산을 오르고 싶었지만, 내륙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14. 젖어서 한결 더 진한 붉은색이 된 등산화를 신고 보랏빛 판초형 우의를 걸치고 나는 소백의 들머리에 발을 디뎠다.


15. 억수같이 내리는 비속에 혼자 산을 오른다는 것.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 당시엔 생각이 없었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없었고, 의미도 없었다. 그저 올랐을 뿐이다.


16. 소백을 고른 이유? 역시 없었다. 단지 소백의 매서운 칼바람이 좋았을 뿐이었다.


17. 가쁜 숨을 몰아쉬며, 40분쯤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쏟아지는 폭우를 피해 긴급히 하산하는 아저씨가 보였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걸었다. 아저씨의 눈빛에서는 위험을 경고하기라도 하듯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지만, 20대의 이유 없는 청춘을 막을 순 없었다.


18. 산 중턱을 지났다.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얼어붙어 눈이 되었고, 젖은 지표면은 얼은 지표면이 되어갔다. 우중 산행이, 설산 행이 되었다. 실시간으로 비가 진눈깨비가 되고, 눈이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19.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물이 얼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20. 빨간 등산화에 아이젠을 채우고 스패츠를 착용했다. 얼은 지표면은 어느새 하얗게 변해버렸다. 하산하던 아저씨 이후로 눈 덮인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마주치지 못했다.


21. 눈으로 인해 평탄해진 길의 산을 올랐다. 계속해서 올랐다. 쉬지 않고 걸었다. 백색의 풍경 속에 갇혀 영원히 걷는 것 같았다. 고지는 너무나 멀었다.


22. 정상으로 향할수록 눈은 점점 함박눈이 되어 내렸고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나뭇가지에 많은 눈꽃이 맺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반복되던 풍경 속에 정상의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23. 그날의 칼바람은 생각보다 약했다. 하늘이 비와 눈, 안개를 주는 대신 칼바람을 가져갔다. 밸런스 패치였다.


24. 소백산 정상에 도달했을 때, 우연히 대여섯 명의 한 그룹을 만났다. 나와는 다른 루트로 산에 올라온 분들이었다. 배터리가 방전될까 싶어 가슴 깊이 넣어놓았던 카메라로 사진을 부탁드렸다.


25. 젊은 날의 무모한 패기는 그렇게 추억이 되었다. 



26. 산을 다시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와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함박눈은 눈이 되었고, 진눈깨비로 변하였으며, 산 아래에선 비가 되었다. 눈 덮인 세상은 없었다. 


27. 잠시 꿈나라의 신선계라도 다녀온 기분이었다. 정상에서의 사진이 없었다면, 그 경험은 혼자 산을 오르다가 쓰러져 눈 속에 파묻혀 사라지는 내 의식 속의 마지막 꿈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28. 과거에 내가 등산을 하는 이유는 없었다. 의미도 없었다. 오직 1년에 단 한 번 겨울 산을 올랐을 뿐이다.


29.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 당시의 청춘의 무언가가 나를 움직였을 뿐이다.


30. 현재는 1년에 단 하루도 등산을 하지 않는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의미도 없다.


31.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겨울조차도 산을 오르지 않는다. 


32. 이제 1년에 단 하루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기분을 느끼는 비일상은 없다. 더는 산을 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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