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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yve Mar 31. 2024

거북한 주니어 디자이너라는 말에 대해  

천천히 그리고 계속 걸어보자.

신입, 초급 디자이너, 수습 등등

정작 주니어디자이너는 수식어가 거북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랬다. 몹시나 거북했다.

주니어 디자이너였지만 ‘주니어’라고 불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모난 구석과 반항기 가득했던 나였기에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싫었다’.


주니어(Junior), 미드(Mid-level), 시니어(Senior), 리드(Lead), 디렉터(Director) 중 제일 첫 단계의 위치를 말한다.


아는 게 없었고 경험이 없었지만 그렇게 불리고 소위 ‘애’ 취급받는 게 못마땅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했다.

그대로 해야 했지만 왜 하는지, 이렇게 하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바꿔야 하며 나중에 분명 문제가 생기는데도 말해주지 않았다.

몰라서 질문하면 멍청하다며, 아는 게 없다며, 건방지다며 비인격적 대우와 조롱을 받기 일쑤였다.


왜 함께 만드는 공간에 대한 기본 사항을 알려주지 않고 ‘그냥 해’ 라고 하는지, 왜 실측을 제대로 해야 하는지, 왜 파일 정리를 깔끔하게 해야 하며

왜 도면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작성해야 하는지 나는 그렇게 ‘왜’ 라는 질문들로 가득한, 거북한데 더 거부감 드는 주니어 시설을 보냈다.


알려주지 않으니까 스스로 찾아야 했고 살아남으려고 나머지 공부(?)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누구도 본인들이 이 악물고 해쳐온 값진 경험들을 주니어인 나에게 공유해주려 하지 않았다.


쓰다 보니 서글픔 많은 내 과거사를 밝히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위로부터 지시를 받고 움직여야 하는 위치, 스스로 일을 찾고 스케쥴링을 하면서 업무보고를 하고, 방향성을 잡아서 결과물을 만들고

미팅을 할 수 없기에(예외적으로 ‘하는’ 돌연변이 케이스를  봤지만..) 주니어라고 부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해본 적 없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모른다고 지적당하거나 학교나 학원에서 뭘 배웠냐는 말을 들었다면 그건 나를 깔아 뭉개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깔아뭉개 봤기에 분명하게 그 의도를 알고 있다. 반성이 빠져 있다면 당했던 수모는 배워서 고스란히 답습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모를 게 아니고, 누구나 훈련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어있다.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다시 돌아보고,

만약 현재 그런 상황에 있을 어느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고 싶다.


기초 훈련을 했으나 실전에서 모른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듣고 있으니 또 다른 훈련이 필요하다.

 

공간을 디자인하는데 필요한 레퍼런스(이미지 서치), 디자인 모티브를 찾거나 다이어그램을 만들거나, 도면의 레이어를 정리하거나, 도면 넘버링,

텍스트를 수정하거나, 제안서의 기본 틀을 만들거나 실측하면서 치수를 기입하고 미팅 때 내용을 옮겨적고, 현장의 쓰레기를 치우거나 정리하는 등의 일.


그 하찮고 귀찮으며 쓸데없어 보일 그 작은 훈련을 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내가 이걸 할 게 아닌데..’  

‘내가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나보고 이런 거나 하라고?’

‘아나 진짜..!@#$%’ 등

고백하자면 미숙했던 내가 했던 과거의 불평불만들이다.


다만 분명히 그 황무지 같은 시간 속에서도 성장한다.


소위 과거 내 불만들처럼 ‘이런 하찮은 일‘ 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 들고 힘들다고 생각된다면 5 가지만 체크 해보자.


1. 주니어 디자이너가 모든 공간 디자인에 관련된 일을 디렉팅 할 수 있을까?

2. 럭비공 같은 팀원들의 맨파워를 리드할 수 있을까?

3. 일의 책임을 지고 밀어 붙일 수 있을까?

4. 팀원들의 일을 분배하고 데드라인에 맞게 스케쥴링할 수 있을까?

5. 클라이언트 또는 협력사나 이해관계의 여러 사람들과의 업무 조율이 가능할까?


다섯 가지를 지금 당장 한 명이건 세명이건 다른 팀원들을 이끌고 할 수 없다면 주니어 디자이너라는 걸 인정하자.

 

세상 누구에게나 주니어 시절이 있다.

그런 시간들을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성장을 목표로 작은 성공을 계속하다 보면 분명 가능하다. 그렇게 된다.

나 또한 그랬고 어느 필드에서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개소리’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태어날 때부터 디렉터였거나, 본인들의 ‘갓난아기 시절’은 창피함과 수치스러움을 기억에서 지웠을지도 모르겠다.

 

주니어 디자이너는 좋건 나쁘건 선배의 유/무에 따라 다양한 길을 걷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배와 함께 조직의 스타일을 조금씩 익히면서 ‘나쁜 일머리’와 ‘좋은 일머리’ 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나쁜 것을 익히고 배우면 그 생명이 짧고 좋은 것을 배우면 오랫동안 지속되고 그 선한 영향력은 다음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주니어 디자이너의 입장이라면 조금은 거북하게 들릴 수 있고, 아주 느리게 성장하는 자신에게 답답함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천천히 걸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삶 전체를 놓고 본다면 지금 이 시간은 아주 잠깐의 성장 과정일 뿐이니까.


천천히 걷더라도 묵묵히 그리고 계속 걷는 게 더 중요하다.

그리고 ‘왜’라는 물음과 선한 생각, 좋은 일머리를 배우기로 마음먹길 바라는 게 앞으로의 좋은 디자이너가 될 주니어 디자이너들의 기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의 ‘10,000 시간의 법칙’에서 말하는

매일 3시간씩 10년 혹은, 하루 10시간씩 3년을 훈련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개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주니어 디자이너가 보다,

시간을 의미 있게 흡수해 내는 주니어 디자이너가 되길 희망한다.


천천히 그리고 계속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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