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먼저 결혼한 전남친들을 추억하며

무조건 연애 많이 해보라는 언니들 말, 너무 믿진 마세요

by 김민지
연애 많이 한 애가 결혼도 잘한다,
똥차 가면 벤츠 온다


타고난 팔랑귀라 공부는 멀리해도 언니들이 해주는 조언은 아주 열심히 들었던 나의 20대. 이놈 저놈 다 만나본 20대 끝자락의 지금,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조언 두개를 소개한다. 연애는 많이 해볼 수록 좋다고, 빅데이터가 쌓여야 내게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언니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왜냐고? 결국 그 놈이 그 놈이기 때문이다. 돈을 더 잘 쓰는 놈, 조금 더 잘생긴 놈, 조금 더 배울게 많은 놈이라도 결국 남자는 다 비슷비슷하다. '그래도 이 사람은 좀 다르지 않을까?' 더 기대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재앙이 시작될테다.


왜 연애를 많이 하는 게 해로울까?


적당한 빈도의 연애는 적극 권장이다. 다만, 공백기 없이 연쇄적으로 연애하는 건 비추한다. 어찌됐든 연애는 두 사람이 만나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행위다. 빨강이라는 세상이 있다면, 노란 빛의 세상을 가진 상대로 인해 그 세계가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이 '연애'다.

주황빛이었던 세상이 한 순간 노란 빛을 잃게 되면 다시 나의 빛깔로 돌아오는데, 어째 20여년 동안 꾸준히 나를 이루던 그 빛깔이 낯설게 느껴진다. 붉은 빛으로 돌아오기도 전, 그 낯섦을 마주하기 두려워 최대한 빠른 시간 내 또다른 빛깔의 사람으로 그 공백을 채우려 한다면 내 본연의 색깔까지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무지개 7색의 물감이 섞이면 검정이 되는 것 처럼말이다.


아직 내가 누군지도 다 파악이 안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대부분의 90년대 생이 진짜 '나답게' 살기 시작한 건 성인이 되고부터다. 이 시점부터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손을 떼고 본인의 노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일거수 일투족 잔소리하던 부모도 에너지가 다했다. 결혼 적령기의 개념이 모호해진 요즘이라지만, 주변 사례를 보면 대부분 똥줄이 타기 시작하는 나이는 여자 나이 서른, 남자 나이 서른 다섯이다. 즉, 여자에겐 10년 이상, 남자에겐 15년 이상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스스로에 대한 탐구가 어느 정도 완료되어야한다는 거다. 100세 인생 중 고작 10%에 해당하는 시간이지만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길 원한다면 이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써야 한다. 본인은 9년간 굳이 들이지 않을 인연들까지 인생에 끊임없이 들여가며 소중한 시간을 다소 낭비한 경향이 있다. 본인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힘들다고 하여 타인에게 맡겨선 안된다. 진짜 나라는 사람은 '물리적, 감정적으로 온전히 혼자일 때' 마주할 수 있다.


킬링타임 영화지만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한 <하우 투 비 싱글>을 소개한다. 극중 여자주인공도 공백기 없이 긴 연애를 하다, 대뜸 나를 찾고 싶다며 만나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한다.


나를 찾고 싶다며 즐겼던 수많은 파티와 짧은 인연들은,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에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 순 있었겠지만 '사랑하는 나, 사랑하는 행위'에 집착하는 그녀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했다. 지나가는 짧은 인연들에게마저 감정 소모를 하고, 다른 상대를 만났으니 나도 달라질거야라는 그녀의 크나큰 착각은 결국 그녀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영화 <하우 투 비 싱글> 중

여주인공은 친구의 촌철살인에 방어적으로 나오며 '본인은 그렇지 않다' 정신 승리를 한다. 찝찝함은 뒤로 한채, 전남친의 전화 한 통에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하룻밤을 보낸다. 문제는 그녀가 100%의 나쁜여자도 아니고, 100%의 착한 여자도 아닌,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고 싶으면서도 속으로는 완벽한 상대와의 완벽한 관계를 갈망하는 50:50의 애매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하룻밤을 보낸 뒤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그녀에게 전남친은 결혼하기 전 그녀와 클로저 겸 한번 자러온 거라고 말한다.


그러자 드디어 깨달음을 얻은 그녀. 꼭 똥인지 된장인지 겪어 봐야 안다.


깨달음을 얻은 그녀는 극이 마무리 되는 시점이 되어서야 진정한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온전히 솔로인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고, 자신의 결점을 채워줄 타인을 만나기보다 그 결점을 채워 나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 얄팍하게 타인에게 기대 쉽게 인생을 살려했던 스스로를 반성한다. 한단계 성장하는 그녀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하우 투 비 싱글> 중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관계가 있다. 외국에서 흔히 말하는 'Situationship: '우리 사귀어' 레이블링 하진 않지만 보통의 연인처럼 '할 건 다 하는' 관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이 관계는 장기연애를 하다 헤어진 커플이 마주하기 쉽다. 몇 년을 함께할 만큼 사랑했고 성격도 잘 맞았는데, 시간이 흘러 서로 바라보는 지점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헤어진 이들은 몇년이 지나도 종종 생각나는 존재로 서로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기준점이 '서로'가 되어버린 이들은 그 기준을 넘는 ‘강력한 상대’가 등장해야만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상대가 주는 도파민이 감소하면서, 이들은 서로를 떠올린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 장기연애 상대는 큰 잘못을 하지 않은 이상 보통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언제든 '잘 지내?' 할 수 있는 관계. '잘 지내?' 한마디가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감히 상상도 안된다면 이 질문엔 답변을 안하는게 좋다. 서로의 보험으로만 존재하다 끝나기 쉽기 때문이다. 현재 만나는 사람과 미화된 과거의 상대를 비교하며, 현재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한 채 마음 한 켠으로는 과거의 상대를 원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일은 남녀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지양해야 할 행위다. 여담이지만 나 또한 누군가를 마음 속에서 쉬이 지우지 못하고, 마음 속 보험으로 두는 이가 있었기에, 그를 원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고 그 과정에서 정작 돌봐야 할 나를 돌보지 못했기에 이 씬을 보며 후회가 몰려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드디어 결론이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똥차는 처리했으니, 이제는 벤츠가 백마탄 왕자님처럼 짠 하고 등장하길 바라는가? 슬프지만 앞서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남자는 다 그놈이 그놈이라 벤츠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특별한 누군가가 내 인생에 들어오기를 바라기 보다는 스스로 벤츠가 되는게 우선이다. 이별 후 몰려오는 공허함에 굴복하고, '내가 이러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릴 시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샅샅이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과정은 고통스럽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만큼이나 물리적으로도 부담스럽고 정신적으로는 더더욱 피로하다. 하지만 이 고통을 충분히 느껴야 조금은 발전한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조금 더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이 과정이 없으면 연애만 많이 해본 사람이 되는거다. 유의미한빅데이터가 아닌, 쓰잘데기없는 빅데이터까지 다방면의 케이스로 수집만 해온 사람이 되는거다.


몇십년을 같이 살기에 적합한 배우자를 야물딱지게 잘 찾고 싶다면, 홀로 있는 시간을 잘 보내야한다. 혼자서도 잘먹고 잘사는 여자. 혼자서도 잘 노는 여자. 똥파리는 예쁘지만 향기는 없는 꽃에 꼬이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충만한 빛깔과 향기를 지닌 사람은 누구도 얕볼 수 없다.

keyword
이전 01화나는 뮤지컬 배우를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