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새끼

1000:1 경쟁률을 뚫었다

by Chloe M
미드 <유포리아> 중


이튿날 힌지 알림이 999개를 찍었다. 과장 1%도 안보태고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프로필에 라이크를 눌렀다. 발에 치이는게 의사, 변호사, 월가 금융권 종사자, NBA 농구 선수도 봤고 자기 전용기를 자랑해놓은 핀테크 기업 CEO도 있었다. 아 역시 세상은 넓고 남자는 발에 치이게 많구나. 새삼 이렇게 넓은 세계를 뒤로하고 우물 안 개구리마냥 좁은 한국 땅에서 썩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렇다. 나는 이 세계에서 삼성전자고 구글이었다.


뉴욕 여행을 함께한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한국에서부터 "나 진짜 데이트 한번만 하게 해줘라" 선전 포고를 여러 차례한 결과 어렵게 얻어낸 단 한 발이었다. 나는 방아쇠를 제대로 당겨야했다. 제대로 뽕을 뽑아야했다. 그 많은 알림이 10이 될 때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을 거르고 걸렀다.


많은 사람들과 매칭을 했고 메세지를 나눴다. 메세지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나에겐 두개의 자아가 있었다. 좀 안전한 사람을 만나 롱텀으로 관계를 이어나갈지, 어차피 한국과 미국은 멀어도 더럽게 머니 진짜 매력적인 사람을 만나 일회성 데이트를 할지. 이 한 발이 뭐라고 더럽게 어렵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다수의 매칭남들과 다르게, 오로지 얼굴과 몸만 보고 매칭했던 남자가 연락이 왔다. 그의 첫마디는 정말 기가 찼다.


여보 밥 해놨어?


뭐 이런 또라이가 있나 싶어 뇌를 빼고 답장했다. "아니 나 밥 못하는데?"


5분 뒤 답이 왔다. "괜찮아 오빠가 밥사줄게". 기가 찼다. 누가 봐도 Fuckboy의 향기가 났다. 하지만 내심 한국에서의 나는 안전한 선택만을 해왔으니 뉴욕에서는 좀 색다른 선택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남자와 실제로 만나게 될 확률은 50:50. 오로지 내 결정에 달렸다.


고민하다 "미슐랭 쓰리 스타로 부탁해 여보~" 라며 화답했다. 그는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보내며 영어로 "대충 보고 니 스타일이면 연락하라"며 쿨하게 메신저를 종료했다. 이 남자, 지가 잘생긴 걸 안다.


영화 <탑건> 중


인스타그램을 정독하며 알아낸 그의 직업은 파일럿이었다. 사실 이미 어플에 적혀있었지만 그의 프로필을 열심히 보지도 않아서 이 사달이 난것이다. (때마침 할로윈 시즌이라 그저 코스튬 정도로 생각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탄탄하기만 한 몸이 아니라 예쁜 몸이다. 운동하고 비행하는 영상보다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수준급의 기타 실력을 자랑하는 영상들이겠다. 음악을 전공한 내게 악기를 잘 다루는 남자는 아킬레스건이다. 본인이 어느 정도로 기타라는 악기에 약하냐면, 홀로 스페인에 가게 된다면 바르셀로나 마드리드도 물론 좋지만 세비야 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는 꿈이 있다. 끈적한 클래식 기타 소리를 배경으로 세비야 광장을 거닐겠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어.


그 놈의 기타 소리가 화려한 뉴욕을 관광하는 내내 귀에 맴돌았다. 해질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올라, "너 이래도 나한테 안 반하고 배겨?" 속삭이는 뉴욕 시의 야경을 보면서도 "아 얘를 만나 말아" 고민스러웠다. 누가 봐도 결혼 적령기에 안정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정말 일회성 만남으로 끝나기에 최적의 사람. 숙소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뉘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Whatever, fuck it.


셀프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기. 내 나이대 여자라면 잘 안하는 선택인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긴 뉴욕이다. 내돈내산 여행 중이니 여기선 내가 하고싶은 거 다 한다.


그는 61층 꼭대기에 위치한 아메리칸 레스토랑을 예약해뒀으니 수요일 저녁에 만나자했다. 알겠다며 따로 연락을 이어가진 않았으나 내심 기대했다. 생전 처음 깔아보는 소개팅 앱, 낯선 타국 땅에서 만나는 이방인이 궁금했고, 무섭지만 설렜다.


고대하던 수요일이 도래했다. 귀국까지 이틀 남긴 시점이었다. 대한항공에서 체크인하라고 알림이 왔다. (나는 이 알림을 가장 싫어한다) 이제 막 시차에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나 정말 뉴욕 떠나기 싫은데. 얼마 남지 않은 뉴욕에서의 시간에 마음이 조급해져 아침부터 페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갔다. 브룩클린 브릿지를 건너며 세상은 넓고 나는 정말 작은 미물에 불과하구나, 도시의 웅장함에 압도당하고 있을 때 쯤 그에게 연락이 왔다.


미안한데 오늘 못 볼거 같아. 보스톤으로 비행 잡혔어


쿵! 가슴에 돌이 떨어졌다. 이건 예상 못했던 그림이다. 그렇다. 그는 말 그대로 힌지에서 만난 랜덤한 남자고 실물은 보지도 못한 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뉴욕에 와서 가장 고대하던 데이팅 콘텐츠를 실행하지 못하게 되니 김이 팍 샜다. (사실 내가 그냥 여기 살았으면 이렇게 똥줄이 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음으로 미루거나 다른 사람 만나면 되니까) 내게 남은 시간은 단 이틀인데. 지랄 말고 안전빵 만나라는 신의 계시일까. 나는 그 계시를 무시했다. 못 만나게 되니 오기가 생겼다. 너 내가 어떻게 생긴 새낀지 얼굴은 보고 한국간다.


근데 나 내일 뉴욕 돌아오니까, if your down i can meet you up tomorrow


저 'down' 이란 말이 왜 그렇게 신경쓰였는지 모른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내게 저 'down'이라는 글자는 마치 '니가 진짜 원하면~' 혹은 '너가 진짜 내가 보고싶으면~' 과 같은 뉘앙스를 줬다. 내가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얘 진짜 뭐하잔거지" 싶었으나 실제로 더 간절한 쪽은 나였다. 자존심 굽히고 "그럼 내일 보자, 나 내일 마지막 날인데 이번에도 파토내면 진짜 안돼. 내 마지막 날을 망치지 마"라고 답했다. 그는 알겠다며 또 쿨하게 대화를 종료했다. 만나기도 전인데 지 멋대로 하는 새끼의 향기를 진하게 풍겼다. 나 진짜 이런 사람 안만나는데.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 가진 마지막 한 발을 낭비할 수 없었던 만큼 이 사람을 전적으로 믿을 순 없었다. 또 파토내면 어쩌려고? 이에 열심히 백업 플랜 3명을 만들었다. Sorry for being a bitch. 마지막 날이라고요. 좀 봐줘요.


To be continued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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