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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피엔스적 Aug 17. 2023

꼰대가 돼버린 아재의 청춘 염탐기

치사한 위안을 얻고 가다

 "그런 사소한 표현 하나하나로


자신의 프라이드를 지키겠다는


그런 모습,


아무도 이해 안 해.


아무도 따라와 주지 않아."



어느덧 꼰대가 돼 버리고 나니, 관찰자의 입장이란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 때는 그러지 않았어'라고 말은 못 해도, '나는 달랐어'라며 과거를 떠올리고 위안을 얻는 건 꼰대에게 아이러니함을 떠올리게 한다.


1989년생, MZ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아사이 료가 자신의 경험인지 뭔지 모를 걸 쏟아낸 '누구'는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을 근질근질하게, 한 마디씩 던지게 하고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체적 나이가 사회적 나이를 넘어설 때쯤, 아니 각각의 정신적 나이를 넘어설 때쯤인 20대 후반은 제2의 사춘기에 찾아온 늦은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닐까. 대부분이 다나베 미즈키처럼 성실하게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시기겠지만, 누군가는 고타로처럼 잠시 동안의 방황을, 미야모토 다카요시처럼 자신이 답인 거 마냥 행동하면서도 어딘지 모를 방향으로 내딛고, 리카 코바야카와처럼 불안을 숨겨가며 버겁게 쫓아가기도 하고, 니노미야 다쿠토처럼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하지만 내심 도망치고 싶은 시기가 이때다.


막상 지나고 보면 가장 힘든 시기도 아니면서, 마치 그 순간이 아니면 내가 뭐라도 할 수 없는 거처럼 느껴지던 시기다. 그런 만큼 고민도 많고 두려움도 많다. 그래서 먼저 취업한 친구를 보며 비교를 하고, 질투를 하고, 화도 내고, 피하기도 한다.

(거기에 연애 감정까지? 친구가 될 수 없다 - Reality bites)


그렇다. 조건 없는 친분으로 친구로 지내던 시기가 지나간다. 서 있는 위치가 다르면 바라보는 게 달라진다. 가치관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던 시기가 이제는 가치관이 달라 거리를 두게 된다. 그 가치관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내 안으로 주어진 거다. 직장으로부터. 직장 생활로부터. 직장 동료로부터.


"그런 너를 너와 똑같이 봐주는 사람은 이제 없어."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기는 그래서 찾아온지도 모른다. 하고픈 게 같으면 함께할 수 있었고, 하고픈 게 같다는 이유가 세상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던 치기는 사라졌다. 그렇게 서로 멀어지면 혼자라는 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혹평을 쏟아내도 연극을 올리는 긴지와 달아나버린 다쿠토의 차이처럼 말이다. 자신의 옆에서 연극을 올리던 긴지는 사라지고 고집스럽게 놓지 못하는 긴지만이 남았다.


다쿠토가 긴지를 바라보는 시각은 시니컬하지만, 다쿠토는 멀리 도망가지 못한다. 중학교 시절에 배운 주변인 마냥 연극을 기웃 거린다. 그에 반해 동거인인 고타로는 인생이 연극이다. 잊지 못한 사랑을 찾기 위한 취업이라니. 용기가 있다. 그에 반해 다쿠토는 말하는 것만큼 용기가 있지 않다.


다쿠토는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짖듯 말이 많다. 익명의 계정으로 밖에 떠들지 못하면서 말이 많다. 그건 용기가 없어서다. 아직 겪지 않은 미래, 어른으로서의 불안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을 견딜 용기가 없다. 그렇다. 어른들을 무시할 수 없는 건, 어떤 선택이 됐든 지금 견디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영화도 있다고 하니 일본에선 꽤 인기였던 듯? - 누구)


일본 특유라고 해야 할지, 좀 예스럽다고 해야 할지. 나오키상을 받을 만한 수려한 문체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누구'라는 책이 갖는 의미는, 공감을 살 수 있는 청춘보다는 꼰대에게 더 있어 보인다. 나오키상의 심사위원들은 아마도 "아, 지금의 청년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하며 상을 줬을 것이다. 그래, 막상 꼰대들은 자신들이 겪어온 길이었음에도 결국 '나는 달랐다'며 가르치려 드는 족속들이다.



한 줄 평 : 신선하지 않은 문체와 내용, 그래서 다가오는 현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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