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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피엔스적 Sep 05. 2023

Chapter. 01 - 베갯머리 대화

달콤한 대화의 타이밍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In Bed'

“필로우 토크?”


이른 토요일 저녁부터 미현의 자취방으로 소집령을 내린 다연에게 미현이 물었다.     


“어, 섹스 후 나누는 베갯머리 대화.”     


“그럼 섹스 후에 그 사람이 너한테 한 말 때문에 평가가 달라졌단 거야?”     


어느덧 취기가 올라버린 다연에게 미현은 질문을 던졌다. 익숙한 듯 자리를 잡고 맥주캔을 따고 있는 다연은 미현에게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쳐다본 눈길만 봐도 알겠다는 듯 미현은 말을 이어 간다.     


“아니, 말을 한 게 아니라 말도 하기 전에 담배를 피더라고.”     


“단지 그거 때문에 불금에 만난 사람을 놔두고 나와 버렸다고?”     


미현은 재차 물어본다. 다연은 이번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란 걸 안다. 이런 날은 이미 몇 번 있었다. 빠를 때는 카페에서 만난 지 30분도 되기 전에 나와 버린 적도 있었다. 그냥 사소한 부분이었다. 그때 미현은 “빨라도 너무 빠르다”고 말했지만 예상했다는 듯, 아니면 기대감이 없었다는 듯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잠자리까지 이어진 만남에서는 의외였다고 생각한 듯하다.     


“어차피 진지한 마음은 없었는 걸.”     


맥주의 탄산감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고서 다연은 대답한다.     


“무슨 말을 해주길 원했는데?”     


“그냥, 이런저런, 우리와 관계된 얘기라면, 섹스 후에 내가 안심될 수 있는 이야기들.”     


“진지하게 만나볼 생각이 없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안심할 수 있는 필로우 토크를 기대하는 건 아이러니하지 않나.”     


관심이 없는 거 같았던 기도가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화에 참여한다. 노트북에는 어딘지 모를 외국의 거리 사진이 띄워져 있다. 또 어디론 가 떠날 계획을 잡나 보다.     


“그게 뭐가 이상해.”     


다연은 ‘애초 내 편을 들 거란 기대는 없다’란 말투로 받아쳤다.     


“처음 본 사람에게 뭘 기대한 거야? 아니, 그 사람을 왜 만난 거야? 왜 잠자리까지 한 거야?”     


기도는 몸을 돌려 다연을 바라보며 말을 한다. 이건 시동이 걸렸다는 의미며, 이 술자리가 피곤해질 수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외모가 적당히 괜찮았고, 대화도 적당히 통했고, 그냥 분위기도 잠자리까지 갈 정도로 적당했어.”     


“그 적당함에 섹스 후 대화도 포함이 돼 있어야 하는 건가?”     


“그거도 적당히 해주면 좋지. 그랬다면 아마 오늘도 연락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기대치가 큰데?”     


“어째서?”     


물음표로 이어지는 대화에 다연도 점점 목소리가 높아진다. 화가 난다기보다 기도가 왜 반박하는지 알 수 없기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남자가 섹스 후 떠오르는 생각은 ‘아 씻고 싶다’야. 처음 만난 여자든, 오래된 연인이든 누구든 간에 남자는 섹스 후 그 생각이 먼저 든다고. 정액은 내 몸에서 나오지만 내 몸에 묻어 있는 게 너무 싫어. 근데 그 기분을 참고서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는 거? 심지어 포근하게 안아주면서? 그거 단연코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의 영역이고 그건 사랑이야.”     


“누가 사랑 해달래? 그냥 안정감을 원한 거뿐이라고.”     


“안정감이란 걸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느낀다면 그것도 문제지.”     


“그건 또 왜?”     


“사람은 미지의 영역과 새로운 것에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 근데 단지 30분간 대화하고, 두 시간 동안 술을 마신 사람이 잠자리 후에 안아줬다고 안정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잠자리를 가지기 전에 같이 있었던 세 시간 사이에 이미 안심된다고 느꼈을 거고, 필로우 토크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 같은데.”     


“필로우 토크는 다른 문제지. 섹스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교감의 끝이고 필로우 토크는 그 마무리라고.”     


“그런 교감의 기회를 너무 쉽게 준거라 생각하진 않아?”     


“너는.” 다연은 한 번 말을 참으며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너는 짜증나.”라고 말을 맺는다.     


“음… 필로우 토크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가.”     


선천적 평화주의자인 미현이 다시 대화를 주도한다.      


“필로우 토크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그걸 기대했느냐가 중요한 거지.” 미현에게 답변하는 기도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중기는 어떤데? 너네 자주는 해?” 다연은 기도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글쎄…. 그냥 ‘뭐 시켜 먹을까’나 ‘오늘은 오후에 나가야 돼’라던가, ‘어제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집에 들러야 할 거 같아’라던지. 그냥 그런 대화를 하는 거 같은데.”     


“안정감 있네.” 기도도 오늘 첫 맥주캔을 따고서 호응을 한다. 미현은 ‘그런가?’ 싶은 표정으로 눈을 한층 크게 뜨고서 맥주를 넘긴다.     


“몇 년 됐지?”라고 다연이 묻자 “6년? 이제 7년인가?”라고 미현이 답한다.     


“장기 연애 커플답네”란 말과 함께 다연도 맥주를 마신다. 열기가 빠지지 않는 방에 맥주가 미지근해지면서 속이 시원해지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귈 수 있지?” 다연이 미현에게 부러운 게 있다면 오래된 연인의 존재다. 미현을 보다 보면 자신은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미현이 늘 저렇게 평온한 건 중기의 존재 덕분이 아닐까.  


“그냥 맞춰진 거지.” 미현이 말을 하자 “그거지”라고 기도가 답한다.     


“뭘 그렇게 호응하고 있어.” 다연이 기도를 쳐다보자 “너에게 없는 거”라고 기도도 다연을 쳐다본다.     


“뭐가 없어.”     


“넌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기대치만 잔뜩 있지. 근데 정작 넌 반대가 없어.”     


“반대? 반대가 끌린다고 할 때 그 반대?”     


“하…” 한숨을 내뱉은 기도는 “카페에서 30분 만에 혼자 남겨진 사람은 너가 마음에 들었을까?”     


“모르지, 듣지도 않았고 들을 생각도 없는 데.”     


“그거 봐. 넌 니 기대치만 충족되길 바랐을 뿐이지. 상대방은 어떤 사람을 기대하고 나왔는지, 그날 나온 너가 어떤 사람이길 바랐는지 묻지도 않았을 거고, 30분 안에 니가 보여준 행동 중에 분명 서너 가지는 맘에 들지 않았을 거고. 근데 너는 니 기대치를 충족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30분 만에 판단하고 나온 거고.”     


“더 이상 시간 들여 봐야 끝이 뻔한데, 오히려 둘 다에게 좋은 거 아냐?”     


“중기는 처음에 진짜 맘에 들지 않았어.” 의외의 타이밍에 끼어든 미현의 말에 기도도, 다연도 말을 멈췄다.     

“근데 그냥 맞춰 간 거야. 우린. 그리고 지금은 좋아.” 미현은 그렇게만 말하고서는 맥주를 마셨다. 기도도 맥주를 마셨다. 다연은 맥주를 마시려다 다시 놓았다. 그리고 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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