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는 '참사'를 만나다.
2011년 8월 31일 '가습기살균제참사'가 세상에 드러났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발생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참사'가 일어났다. 우리는 이 재난들을 '사회적 참사'라고 부른다.
인간은 재난을 피할 수 없다. 피해보려고 애를 쓰는 것은 가능하다. 재난 피해를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재난으로부터 배워야 할 이유이다. 재난으로부터 교훈을 찾고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다. 누구나 재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재난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재난의 희생자들, 피해자들과 함께 해야 할 이유이다. 재난을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나와 가족은 2011년 8월 공포스러웠던 가습기살균제참사의 피해를 겪었다. 다행히 운명의 여신은 상처만 남기고 우리 가족을 비껴갔다. 저마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나는 싸움으로 맞섰다. 그 싸움이 대단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겪었던 경험에 대해서 기억에 남아 있을 때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기록하자니 그동안 너무 게을렀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미 많은 기억이 희미해졌고, 섞이고 모호해졌다. 그때그때 기록해두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컸다. 이런저런 한계로 망설이기도 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분명하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딸이 겪었던 아픔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른이자, 아빠로서 딸에게 변명하고자 글을 쓴다. 아빠의 변명에서 조금이라도 진정성이 느껴진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빠의 누추한 변명이 딸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면 좋겠다. 더 큰 희생과 피해를 겪은 피해자와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참사가 일어나는 것일까. 여러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소비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서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인간은 소비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들다.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소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소비 인간'이라는 점을 특별히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소비 불감증'일 수 있다. 여기에 '안전'이 끼어들면, 소비 불감증은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다. '소비 안전 불감증'이 되기 때문이다. 안전에 민감하지 못한 소비사회는 곧 '위험사회'가 된다. 나는 가습기살균제참사를 통해 소비사회와 위험사회의 문제를 다뤄보려고 한다.
가습기살균제참사는 2011년 8월 31일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 알려졌다. 그 해 4월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던 산모와 아이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이나 괴질 등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그즈음 서울아산병원의 한 의사가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에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질병관리본부는 8월 31일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였고 '가습기살균제'가 원인미상 폐질환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목했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이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안타까움, 공포, 불행, 기업의 탐욕, 정부의 무능 등등.' 나에게는 ‘어처구니없음’이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은 ‘일이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다’는 뜻(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다. ‘어이없다’는 뜻과 유사하다.
우리 사회는 이 참사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보는 입장에 따라 이 사안이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2023년 1월 말 현재 피해 신고자가 7,811명, 이 중 사망자가 1,802명이다. 물론 피해 신고자에 대한 정부의 피해 인정 결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규모가 상당하다. 신고 기준이 아닌 전체 피해규모를 추산한 수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이미 언론을 통해 공개되어 있다.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가습기살균제참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201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겨울, 딸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감기는 잘 낫지 않았고, 기침은 이어졌다. 보통 며칠 앓고 지나가는 것이 감기다. 기침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면 불안해진다. '감기가 계속되는 것인가?, 폐렴이 오는 것인가?' 가습기를 틀어 실내 습도를 조절했다.
비교적 늦은 결혼과 늦게 가진 외동딸. 철없고 미숙하기 그지없는 부모를 의지하며 세상으로 용기 있게 나와 준 아이였다. 밖으로만 돌던 아빠는 기침하는 아이에 대해 '아프면서 크는 아이'로만 생각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무한 사랑으로, '세상의 중심'으로 삼고 돌봤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2010년 그해 겨울, '가습기살균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집안을 덮고 있었다.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이 대부분인 주거 현실에서 건조한 실내공기는 감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겨울철 건조한 실내공기로부터 아이들의 건강을 지키십시오. 가족의 건강을 지키십시오.’ 가습기는 실내 습도를 조절하기 위한 소비 문명의 선물이었다. 가습기는 이미 보급품이 되어 있었다.
가습기 통에 물을 넣어두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물 떼가 끼는 문제가 발생했다. 물 떼와 함께 세균이 번식할 우려가 있었다. 시장은 문제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해결의 단서를 찾아냈다. 가습기 물통에서 곰팡이가 생기고 세균이 번식할 수 있다면, 이를 억제하고 제거하면 되는 일이었다. ‘가습기살균제’의 등장이었다.
가습기가 그렇듯이 가습기살균제도 생활의 필수품처럼 ‘보급품’이 되어갔다. 크고 작은 기업들이 너도나도 만들어 팔았다. 가습기살균제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팽창했다. 엄마들은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광고문구에 현혹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등장하면서 우리 사회는 더욱 민주화되었고, 국민들은 똘똘 뭉쳐서 IMF국란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외국기업에게 시장을 개방하였고, 규제를 풀어가면서 무너진 경제를 회복했다. 경제를 회복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국민들은 정부와 기업을 믿고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승인했다.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친 이후, 우리 사회는 급기야 기업을 이끈 맹장을 ‘경제 대통령’으로 뽑았다. 정치적 민주주의, 시민 민주주의가 '경제 민주주의'로 변신하는 착각과 허상에 빠져 든 시기였다. ‘부자 되세요!’라는 어느 광고 카피가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국민들은 기업의 '소비자'가 되었다.
가습기살균제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잘 팔리는 히트상품이었다. ‘가정용 생활용품’으로서 이미 일상의 필수품이 되었다. 낮은 단가로 판촉물과 같은 미끼 상품으로 시중 마트에서 팔려나갔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특별한 누군가가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가습기를 사용하는 집에서는 거의 필수품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와 배경으로 2010년 가습기살균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무런 제재와 의심 없이 우리 사회에, 우리 집안에 침투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이 엄마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아이 엄마는 시내 대형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외동딸은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 절대적인 존재였고, 전부와 같은 존재였다. 간호사로서 누구보다도 위생을 신경 썼고, 집에서도 그랬다. 아이를 돌보는 데도 그랬다.
우리 집은 공동주택으로 중앙난방이었다. 환절기나 동절기에 건조한 환경이어서 빨래를 널고 하면서, 실내 습도를 관리했다. 당시 가습기살균제가 입소문을 타고 곳곳에서 판매되었다. 아이 엄마는 쉽게 판매대에 있는 가습기살균제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것은 '직감' 같은 것으로, 어떤 '찜찜함'이었다. 아이 엄마는 친환경 먹거리와 착한 소비를 표방하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의 조합원이었다. 먹거리 안전에 신경을 썼다. 소비자로서 안전에 조금 더 예민한 편이었다.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아이엄마였지만,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인들과 대화 모임에서 간혹 언급되고 하던 가습기살균제는 여전히 '유혹'이었다. 급기야, 친환경으로 ‘둔갑한’ 가습기살균제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유사 친환경 매장'에서 버젓이 판매되었다. 아이 엄마는 친환경 매장에 등장한 제품을 인터넷을 통해 검색했다.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인터넷 판매를 중심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해당 제품은 아주 작은 중소기업에서 생산했다. 원료는 덴마크에서 수입했다.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인터넷 맘 카페 등을 통해 홍보되었다. 친환경 이미지를 가진 북유럽 국가인 덴마크에서 천연원료로 만들어진 제품으로 ‘오인’되는 상황이 되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게 사람이고, 소비자의 심리이다. 평소 지역 생협 매장에서 제품을 구매하면서 ‘친환경, 유기농’ 문구에 신뢰를 보인 아이 엄마였다. 때마침, 친환경 가습기살균제가 등장했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렇게 우리 집도 '구멍'이 뚫렸고, 가습기살균제의 어두운 그림자는 집안에서 '똬리'를 틀었다. 2010년 그해 겨울이 시작되던 때부터, 다음 해 봄까지 아이의 기침이 계속됐다. 알 수 없는 감기 증상에 속수무책이었다.
겨울철이 지났지만 여진은 이어졌다. 이미 훼손된 아이의 건강 탓에, 회복되지 않은 기침과 감기 증상이 이어졌다.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가습기와 가습기살균제에 대한 의존은 드문드문 지속됐다. 나빠진 건강 탓에 아이는 말라 갔고, 바튼 기침은 계속되었다. 그래도 아이는 놀았다. 정확히는 '아이가 논 것인지, 견디고 이겨내며 싸우고 있었던 것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 '천운'이었을까. 아이엄마가 어느 날, ‘이상 징후’를 포착했다. 밤 사이 잠이 든 아이의 호흡소리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의 호흡수를 세다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의 호흡수가 매우 빨라져 있음을 감지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경험한 임상을 통해 심각한 신호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이 엄마는 다음 날 서울대병원에 예약을 했고, 2011년 6월 어느 날 병원을 찾았다. 아이는 아팠지만 잘 웃었다. 조금의 불안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 괜찮을 거야.’라고 안심했다. 그러나 가습기살균제의 어두운 그림자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았다.
"간질성 폐질환이라는 질환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발견되지 않았던, 드문 질환입니다. 원인을 알 수 없고 예후가 좋지 않습니다. 치료법도 없지만 의료진으로써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입원 당시에 의사로부터 들은 대략적인 말이었다. 응급실에서 영상촬영 등 몇 가지 조치를 통해 확인된 결과였다. 당시 의사의 진단은 ‘설마 설마’였고, ‘청천벽력’이었다. 생전에 들어 본 적도 없는 ‘간질성 폐질환’이라니. 하늘이 노래졌고, 머리는 텅 비어 새까맣게 변했다.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현실 부정', '현실 거부'가 앞섰다. '의사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우겼다.
'아이를 병원에 맡길 수 없다, 치료법이 없다면 지리산이라도 가서 내 손으로 고치겠다.'라는 마음이 앞섰다. "하루라도 늦출 수 없다. 바로 입원을 시켜서 치료해야 한다."는 의사의 요구를 뿌리쳤다. 아이 엄마는 "병원과 의사를 믿어야 한다."라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이곳저곳 지인들에게 수소문도 해보고, 밤새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병원과 의사말을 믿어야 하나. 달리 어떻게 해야 하나.'
다음 날, "자신도 딸들을 키우고 있으며, 같은 상황이면 자신은 병원에 아이를 입원시키겠다."는 의사의 말에 결국 설득당했다. 대신 "아이를 과도하게 다루지 말아 달라. 치료 과정에서 부모와 충분하게 협의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그렇게 하겠다."라고 했다. 부모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담당의사와 의료진은 부모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지나서 생각하니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한 달간 진행된 입원치료를 통해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염증 진행이 멈췄다. 의료진들은 예후가 좋지 않았던 다른 환자의 사례처럼 '상황이 급속히 나빠지는 경우'를 가장 경계하고 우려했었다. 입원 초기에는 고농도 스테로이드제 치료를 통해 집중적인 염증 치료가 진행됐다. 급한 불을 끈 이후에는 단계적으로 스테로이드제 투약을 줄여나가면서 부작용 등 경과를 관찰하였다.
치료 당시에는 치료의 결과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료진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 입원 당시 하루라도 빨리 입원을 시켜서 치료과정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료진의 다급한 판단, 자신의 딸이었더라도 똑같은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는 담당의사의 말. 아이에 대한 치료를 믿고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의료진의 이런 책임감과 진정성 있는 마음 때문이었다. 고맙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맙고 감사한 것은 사실, 아이였다. 견뎌주고 버텨준 아이가 없었다면 이 모든 시간은 가능하지 않았다. 늦게나마 기억을 더듬어 가며, 지난 시간을 기록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이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아이 아빠로서, 또 부족한 어른으로서 어떤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덜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