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과 고집이 맞서다.

에피소드 : 아이의 시간과 어른들의 무지

by 걷는파랑새

그랬다! 아이가 견뎌주었다. 서툴고 부족한 엄마와 아빠를 선택해서 나온 것도 아이였다. 일하는 엄마의 딸로 꿋꿋하게 자라 준 것도 아이였다. 아빠의 어설픈 육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참아 준 것도 아이였다.


아빠로서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일방적인 것이었는지, 당시를 돌아보면 황당한 에피소드들이 넘친다. 아이는 지금도 어른스럽게(?) 재래시장 순댓국을 즐긴다.(어쩌다!) 순댓국을 맛있게 먹는 딸을 보면 흐뭇하면서도, 민망하다. 육아를 한다며 어른들의 술자리에 종종 데리고 다닌 탓이다. 당시를 회상할 때면 딸은 "여기가 외국이었다면 아빠는 신고감이야."라고 서슴없이 말한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실, 아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육아의 여러 사건들은 차마 부끄러워 언급을 생략하겠다. 가끔 웃으면서 회고할 수는 있지만, 씁쓸한 과거의 기억이고 추억이다.




그중 약간 '저린' 기억도 있다. 그날은 처갓집에 들렀을 때였고, 기침 때문에 근처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면 엑스레이 촬영을 해서 폐렴으로 갔는지를 살펴보곤 했다. 그런데 이 날은 아이가 좀처럼 진료에 협조하지 않았다. 엑스레이 촬영을 완강하게 거부하였고, 또 거부하였다. 떼를 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해 조금은 민망했다.


설득하다가 안 되어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이 있는 2층에서 내려와, 주차장에 대기해 놓은 차로 갔다. 말 안 듣는 아이의 버릇을 고치겠다며, "손들어" 하고 벌을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는 꿈쩍하지 않았고 손을 내릴 기색도 없었다. 아빠의 '고집'과 아이의 '고집'이 충돌했다. 결국 아빠가 손을 들었다.


2011년 그 해였고, 아이가 아파서 긴급하게 대형 병원에 가기 한 두 달 전쯤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가 그렇게 싫어할 때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나중에 안 것이기는 했지만, 아이는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되고 있었다. 그것을 모른 채, 감기 정도로만 생각해서 아이가 떼를 쓰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나중에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심각한 증상을 겪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도 미안해지는 사건이었다. 고집스럽게 저항하는 아이에 대한 믿음도 생겼지만, 두고두고 미안했다. 아이가 컸을 때 "아빠가 그때는 미안했다."라고 사과했다. 아이는 기억도 못하고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리다.




이런 기억도 있다. 아이 엄마는 병원에 근무하면서 노조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이다. 2011년 5월 1일에 엄마와 아빠가 함께 노동절 거리행진에 참여했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참여하였으니, 당연히 어린 딸도 함께했다. 그때까지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단순 감기로만 무디게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 손에 딸려서 거리 행진에 나선 것이지만,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멀었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어른들의 '무지'였다. 한 달 정도 뒤에 아이는 병원에 입원했다. 지나고 보니 겪었던 일련의 상황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경우였다. 우리의 경우처럼 다른 부모들도 아픈 아이의 증상을 단순 감기로만 여겼을 것이다.


돌아보면 아프고 아린 기억들이 많지만, 가장 큰 것은 아이에 대한 고마움이다. 견뎌주었기 때문이다. 아픈 와중에도 ‘고집’으로 아빠에게 맞섰고, 엄마와 아빠의 나들이 길에도 기꺼이 동참해 줬다. 이미 살이 많이 빠져서 힘들 법도 했는데, 병원에 가기 직전까지도 아이는 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가 입원했을 당시에도 엉터리 아빠인 나는 또 엉터리 같은 행동을 했으니, 겸연쩍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이다. 나의 성향은 기존 의료체계, 병원에 대해 신뢰가 적었다. 의심도 많아 다소 편견과 편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니, 말 그대로 좌불안석이었다. 입원 중에도 한방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다른 치료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현재 의료진과 아이를 믿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래, 아이가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해. 별 일 아니다 생각하고,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해.’


나는 딸에게 너스레를 떨고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래서 한 것 중에 하나가, 병원 근처에서 지인과 술 한 잔 걸치고 얼큰해져서 병실에 있는 아이 곁으로 오기도 했다. 술 좋아해서 술 마시는 아빠의 모습이 일상이었으니, 입원 중에도 아빠의 모습은 변함이 없어야 했다.


그것이 아이를 안심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 경과가 좋아졌으니, 이런 ‘실토(!)’도 해보지만, 만약 그 반대의 경우였다면 얼마나 ‘자책’이 컸을까. 결과적으로 아빠는 ‘좌충우돌’이었고, 엄마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딸은 딱 한 달 입원한 후 퇴원했다. 아이는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질환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였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안했다. 집 안에 어떤 원인이 있었다면 아이는 다시 아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이와 아이엄마는 병원에서 멀지 않은 처갓집으로 가서 머물렀다. 퇴원은 하였지만 먹는 스테로이드제 처방을 받으면서 추후 경과를 계속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가 완전하게 회복될 때까지 계속 돌봐야 해서 아이 엄마는 1년 휴직을 냈다.


기존에 살던 집에서 이사도 했다.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이 공기가 좋은 시골로 내려갈지 여부였다. 만약 상황이 나빴다면 아이를 위해서 시골로 가는 것이 1순위였을 것이다. 다행히 아이가 더 나빠지지 않았다. 아이 엄마의 직장 문제도 걸려 있었다. 나 역시도 현재 살던 지역에서 활동해 왔기에 고민했다.


고민 결과, 시골로 가기보다는 현재 살던 지역에서 공기가 좀 더 나은 곳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지역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많이 있는 편이어서, 산 밑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퇴원 후 치료 경과도 좋아져서, 아이는 스테로이드제 치료를 끊을 수 있었다. 아이와 아이 엄마는 처갓집에서 지내다 새로 이사한 집으로 와서 다시 함께 살았다. 가까운 집 근처 병설 유치원에 다니면서 폐 기능을 키워주기 위해 방과 후에는 산행을 하는 ‘산행학교’에 다녔다. 아이는 그렇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휴직한 아이엄마는 언제나 그랬듯이 지극 정성으로 아이를 돌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