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어야 할 ‘2011년 8월 31일’
올 것이 왔다. 2011년 8월 31일, 이날 질병관리청(당시 질본관리본부, 이하 질병청)은 그해 4월 서울아산병원에서 산모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미상 폐질환의 실체가 ‘가습기살균제’라고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로써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환으로 불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괴질’이라고도 불렸던 질환의 실체가 드러났다.
어두운 그림자의 실체가 드러나자 세상은 경악했다. 아이를 잃은 엄마들은 망연자실했고, 비통에 빠졌다. 이 날을 기점으로 아이들의 부모들은 씻을 수 없는 죄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이를 위해 내가 구입한 것이 아이의 목숨을 빼앗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비탄과 탄식, 절망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우리 아이가 입원했을 당시 들었던 질환명은 ‘원인미상 간질성 폐질환’이었다. 금시초문이었다. 이후 ‘원인미상 간질성 폐질환’이 무엇인지 여기저기 수소문하였고,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던 중, 간질성 폐질환 환자 가족들의 커뮤니티를 만나게 되었다. ‘간질성 폐질환으로부터 우리 아이를 지키자’라는 온라인 카페였다.
이 커뮤니티 카페를 통해 같은 또는 유사 질환을 겪는 환자와 가족들의 여러 사례를 만날 수 있었다. 붙들 것이 없는 망막한 상황에서 이 커뮤니티는 가족들에게 큰 위안과 의지가 되었다. 아이 엄마도 이 커뮤니티를 통해 다른 가족들과 소통하면서 위안을 받았고, 정보를 얻고 있었다. 아이와 처한 상황이 비슷한 부모들과는 별도로 소통도 했다.
그러나 ‘원인 미상 폐질환’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그러다가, 2011년 8월 31일 ‘가습기살균제’가 이 질환의 원인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날 발표가 있기 전에도 피해가족들 사이에서 가습기살균제를 의심하는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있었다.
아이를 진료하던 의사도 가습기살균제 사용 여부를 묻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해 4월경부터 질병청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의료진들이나 몇몇 부모들 사이에서는 가습기살균제 이야기가 띄엄띄엄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했던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피해자들의 모임이나 활동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 해 9월 어느 날, 온라인 커뮤니티 카페에서 오프라인 모임이 제안되었다. 이전에 1차 오프라인 모임이 있었지만 나는 알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이번 모임이 2차 모임이었다. 가습기살균제가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해야 했고, 우선 공지된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보자는 생각으로 참석했다.
나의 경우 이날이 다른 피해자 가족들과의 첫 대면이었다. 모임은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환경운동연합 1층 회화나무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20여 명 정도가 모였다. 환경단체 관계자도 와 있었다. 참가한 피해가족 중 한 명이 수소문해서 도움을 요청한 경우였다. 해당 환경단체는 ‘환경보건시민센터’였다.
모 방송 카메라와 기자도 와 있었다. 그해 4월경 불거진 서울아산병원 산모 사례 등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과 만난 경우였다. 방송기자는 이날 취재 과정에 대해 다른 방송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며 ‘오프 더 레코드’를 요청했다. 아마도 ‘특종’에 대한 욕심 때문이지 싶었다.
이날 모임을 제안하고 진행한 00 아빠는 소송에 참가할 피해자 가족들을 모으는 것에 초점을 둔 듯했다. 소송 참가자 모집과 소송 진행 방식 등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1차 모임에서 그런 문제의식을 나누었는지도 모른다. 이날 모임은 한두 시간 정도 진행된 것 같은데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모임에서 처음 만났을 때 참석자들, 특히 엄마들이 많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였지만 누구도 선뜻 진행에 나서지 않았다. 말없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 00 아빠가 소송 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의견 교환은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너무 황당하고 비통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소송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 모임을 제안했겠지만, 말을 꺼낸 00 아빠나, 참석한 모두에게는 너무도 힘든 자리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침묵만 하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겠다 싶었다. 실체(원인)를 알게 된 이상 뭐라도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내어 다른 목소리를 냈다. “누군가 환경단체에 연락해서 그분들도 모셨으니 소송과 별도로 함께 대책활동을 해야 한다.”라고 의견을 냈다.
소송도 대책활동의 일환이므로 다른 것도 아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길이 다를 수도 있었다. 즉 이날 모임을 통해 피해자 활동에 대한 두 개의 길이 제시되었다. 소송으로 가는 길과 이와 별도로, 사회적으로 피해 사실을 알리면서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피해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길이었다.
나는 후자의 길을 제안했다. 나는 지역에서 엔지오(NGO) 활동도 하였고, 지역 언론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피해가족 당사자로서 보다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나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비통하고 슬퍼하고 있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적극적인 대책활동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 검열도 있었다. 그러나 피해가족 중 누군가가 처음부터 환경단체를 부른 상황이었다.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대책활동을 제안했다. 참석자들 중 몇 명이 나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날 모임 후에 피해자 가족 몇 명과 참석했던 환경단체 관계자들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들과 함께 다음 모임 일정을 잡았다. 이렇게 피해자 또는 피해자 가족 당사자로서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대책활동을 시작했다. 피해대책활동을 시작하면서 기존 커뮤니티와 별도로 새로운 인터넷 카페를 오픈했다. 모임 이름은 ‘가습기살균제피해대책모임’이었다. 이후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이하 ‘가피모’)으로 변경했다.
가피모의 첫 대외활동은 환경보건시민센터가 마련한 첫 피해가족 기자회견에 함께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기자회견은 2011년 9월 20일, 서울 환경재단 레이철칼슨홀에서 진행됐다. 이날이 가습기살균제 피해가족들의 공개적인 첫 항의행동이었다.
기자회견을 통해 8 가족의 산모와 피해사례가 발표되었다. 이 중 3 가족이 직접 참석해 증언했다. 그동안 원인미상 간질성 폐렴으로 산모 사례가 부각되었지만,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영유아 사례’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기자회견장은 눈물바다, 그 자체였다. 피해 사례를 발표하는 피해가족이나 취재진들은 눈시울을 붉히거나 눈물을 흘렸다. 산모와 아이들의 죽음과 고통은 인간이 느끼고 견뎌야 하는 가장 큰 슬픔의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