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투명한 것들

가을 연작시 1편 (프롤로그)

by 정하


오래된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투명한 물빛 속에 숨어 있던
떠나간 시간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의 이름을 건지면
그 뒤에 젖어 있는 이야기들도
조용히 따라온다.

낮게 깔린 햇빛에
나뭇잎의 뼈대가 가늘게 드러나면
희미해진 이름 하나가
잎맥 사이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잊힌 이야기를
조심스레 끌어올리면
무게를 벗은 감정의 낱알들이
빛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숨을 틔운다.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이
어디선가 숨결을 찾아
내 심연 깊은 곳에서
은은히 빛을 내기 시작한다.

이 계절, 나는
나를 들여다보며
나이테를 한 줄 더 입고
말없이 키가 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