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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진 May 29. 2024

네발걸음

엽편소설


  조규행은 네발로 걷는다. 걷는다―기 보다는 두 손과 두 무릎으로 바닥을 기는 것에 가깝지만.


  상영관을 나서며 태희가 말했다. 

  "강아지가 안 죽어서 정말 다행이야."

  두 사람은 막 수백 명이 죽는 재난영화를 보고 나왔다.

  "다행인가, 사람 수백 명이 죽었는데."

  조규행의 대꾸에 태희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어차피 영화인데 인간이 죽든 말든 내 알 바야?" 

  태희는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조규행을 앞질러 갔고 조규행은 팝콘과 콜라로 이루어진 커플 세트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태희 뒤를 따랐다. 

  조규행은 당황하지 않았다. 태희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가족과 애인, 가까운 지인보다 인스타 릴스나 유튜브 쇼츠 속 동물에게 사랑을 쏟는(태희는 알레르기가 심해 동물을 기르지 못한다. 책임감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또, 조규행은 질투하지 않았다. 귀여움을 타고나지 못한 죄로 조규행은 조규행만의 방식으로 태희의 사랑을 갈구해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봤어? 그 네발 로봇." 

두 사람은 SNS 커플 이벤트에 당첨되어 로봇 쇼를 관람했다. 태희는 무대에서 공중제비 돌던 네발 로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로봇은 꺾쇠 모양의 네 개의 다리로 걷고 뛰고 재주를 부렸다. 고르지 않은 무대 바닥에 잘못 착지해 중심을 잃어 버둥대기도 했는데, 태희는 그것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조규행은 혼란스러웠다. 보송한 솜털 한 줌 없고, 하물며 얼굴이라 부를 것도 마땅치 않은 그것의 어디가 그렇게 사랑스러웠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글쎄, 다리가 네 개라?" 

  태희는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조규행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이해 못 한 게 뭐 대수인가 싶었다. 중요한 건 태희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태희의 좁은 보폭에 맞춰 걸으며, 조규행은 두 팔을 굽혀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손. 손이지, 그런데 언제까지― 손일 수 있을까?

  태희를 바래다주는 동안 조규행의 몸은 점점 굽었다. 진화론 삽화의 역방향을 향했다. 태희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조규행은 두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조규행은 태희를 올려다보았고, 태희는 조규행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조규행은 카페 테이블 아래 납작 엎드려 태희의 무릎에 뺨을 대고 있었다. 뒤 테이블의 아줌마가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 남자애들 차암 연애하기 힘들어. 여자애들이 무슨 종 부리듯 한다니까…. 난 내 아들 저러고 다닐 생각 하면….

  "의자에 앉아." 

  태희가 조규행 쪽으로 몸을 숙여 말했다. 조규행은 고집스럽게 태희의 무릎에 얼굴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본 여대생 둘이 웩,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애교 뭐야? 과해, 과해."

  "쪽팔리니까 그만 일어나라고."  

  조규행이 흠칫 떨며 몸을 일으켰지만, 손과 무릎이 여전히 바닥에 닿은 채였다. 자신을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조규행에게 태희는 질린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그렇게 걷는 것도 그만해. 내가 언제 그래 달랬어? 부담스럽고, 불편하다고."

  태희의 역정에 조규행은 낮게 엎드려 낑낑댔다. 

  "난 그냥. 너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조규행은― 차였다. 따라 걸을 사람 없이 뙤약볕 아래 혼자 걸었다. 나는 숨 막히는 가죽 장갑 속에서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내, 너, 그럴 줄, 알았다!" 

  바닥에 꾹꾹 짓눌릴 때마다 말이 끊겨 답답했다. 손바닥이 다치지 않게 도톰한 가죽장갑을 산 조규행이 원망스러웠다. 지금은, 한여름이다. 

  "차인 얘 속도 말이 아닐 텐데, 꼭 그렇게 말해야 해?" 

  구두코를 질질 끌며 발이 말했다. 발은 무릎이 움직이는 대로 달랑댈 뿐, 조규행이 이족보행을 할 때와 비교도 안 되게 편해 보였다. 발 대신 땅에 짓뭉개진 무릎은 실신 직전이었다. 

  "너야 편하겠지, 이게 웬 횡재야 싶은 것 아냐. 평생 독박 쓰던 걸음을 우리한테 떠넘기니까."

  "태희가 원했다잖아."

  "원하긴 개뿔. 근데 왜 헤어져?"

  "원래 그렇다. 여자들은, 남자가 자기한테 숙이고 기면 좋아하다가, 편해하다가, 결국엔 부담스러워하고 질려한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잡지 페이지를 넘기듯, 발은 우아하고 무관심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정신없이 땅을 짚느라 말을 멈췄다. 그러다 조규행이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오른팔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낼 때, 녀석의 뺨을 후릴 기세로 외쳤다.

  "야! 네 발로 좀 걸어!"

  조규행이 개처럼 헥헥 댔다. 초록 불이 켜지고 손바닥과 무릎을 다시 혹사하기 시작했다. 네 발로 걸으랬더니, 네발로 걷는다. 

  조규행은 네발로 걷는다. 걷는다―기 보다는 두 손과 두 무릎으로 바닥을 기는 것에 가깝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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