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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진 Jan 14. 2023

“일용할 ‘불금’을 주옵시고…”

심너울 「땡큐 갓, 잇츠 프라이데이」 분석


  소설을 읽고 난 후 제목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읽기 전에는 바쁜 한 주를 끝내고 주말의 시작을 맞는 환희가 느껴진 반면, 읽고 난 후에는 일상을 잃고 내지르는 비명에 가깝게 느껴졌다. 제목에 대한 감상과 달리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현이 일상을 잃었건 아니건 그에게 유의미한 요일은 금요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라는 제목은 한 주의 딱 하루만 감사할 수 있는, 기쁨보다 고통이 많은 삶을 조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금요일이 ‘불금’이 되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주 5일제가 도입된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온 가족이 함께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주말이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오늘날엔 주일(主日)인 일요일보다 금요일이 더 신성한 취급을 받는다. 치킨이 ‘치느님’이라 불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지금 시대의 가치는 ‘당장 누릴 수 있는 쾌락’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불금’, 주말의 시작. 해방! 우리의 찬양은 금요일 밤 침대에서, 캔 맥주 앞에서, 알람이 해제된 핸드폰 앞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영혼의 안식은 천국이 아닌 매주 금요일에 있다.     


  근추동 행복(행정복지) 센터 민원팀에서 근무하는 9급 서기보, 김현은 민원인들의 푸대접 속에서 기계적으로 일한다. 금요일 밤, 몹시 지친 상태로 잠든 현은 다시 금요일 아침이 밝은 것에 혼란스러워하고 ‘일주일 뒤’로 예정돼 있던 김장 행사 준비로 인해 잠든 시점으로부터 일주일 뒤의 금요일에 깨어났음을 깨닫는다. 

  다음 주 금요일에 희랑과 저녁 약속을 잡게 된 현은 다음 주에 대한 기대감 속에 잠들지만 또다시 한 주 뒤의 금요일이 밝아 절망한다. 출근도 않은 채 희랑과의 식사 자리에 나간 현은 희랑이 의식론 연구소에서 근무할 당시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식사 자리는 현의 기대와 달리 어떤 진전도 없이 끝났고 또다시 한 주 뒤 금요일에 눈 뜰 것을 대비해 웹캠을 켜둔 현은 기록된 영상 속에서 ‘보기만 해도 피로’할 정도로 규칙적으로 출근하고, 휴식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이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에 미쳐버렸다고 생각한 현은 동장에게 보복하기 위해 복지센터로 향하고,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던 희랑은 현을 기절시킨 뒤 의식론 연구소에 근무할 당시 녹음한 인터뷰를 재생한다. 

  현은 일주일 중 하루만 의식이 각성되는 실험의 피실험자였다. 그는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며 실험 내용에 흔쾌히 동의했고 희랑은 의식을 잃은 동안 현의 평온함과 작업 능률을 고려하며, 이대로 의식 없이 사는 것이 그에게 이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기계]

  “우리 하는 일이 무인 민원 발급기가 하는 일이랑 다름 없잖아요?” (p.76)

  현은 민원팀 업무가 무인발급기의 일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현의 대사뿐 아니라 소설 곳곳의 서술에서도 인간과 기계에 대한 비교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의 인간관계는 사막처럼 삭막해서, 지난 6일 사이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흔적은 딱히 없었다.’ (p.74)

  ‘무인 민원 발급기는 몇몇 식당에 있는 무인 주문기와 일촌 관계에 있는 기계들이었다. (…) 아직 인간은 무인 발급기보다 훨씬 우월했다.’ (p.77)

  인간 중심의 ‘일촌 관계’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인간과 기계 사이의 벽을 허물기도 하고,  

   

  ‘그 남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정물에 훨씬 가까워 보였다.’ (p.81)

  기계는 의인화, 인간은 사물화 하는 서술도 발견할 수 있다.     


  “일주일 뒤야, 사랑의 김장 행사. 다들 김치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나눠 줄 준비 해야지?” (p.68)

  현은 자신을 사람 대접해주지 않는 민원인과 동장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한테’ 나눠주기 위해 노동할 준비를 하라는 동장의 말은 민원팀 전원을 ‘사람’에서 배제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이 이 부당한 인식의 무조건적인 피해자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은 바이다.     


  “민원 발급기 진짜 이상하잖아요. 아시면서…. 그리고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것도 있죠.”

  “그게 뭔데요?” (p.77)

  “(…) 노동으로 자아 개발 이런 거 다 헛소리라고요. 아가씨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p.84)

  현 역시 희랑을 포함한 민원팀 전원을 기계와 동일시하는 등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주말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해 보니 무서움을 넘어 역하기까지 했다. (…) 그 삐걱대는 움직임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을 애써 모방했으나 처참히 실패한 로봇에 가까워 보였다.’ (p.81)

  현은 갑자기 찾아온 금요일의 재앙이 자신을 ‘강시’나 ‘좀비’처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취미 하나 없이 출퇴근을 반복하던 삶을 객관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현이 도달한 것은 성찰이 아닌 광기였지만.      


  [삶의 양면성]

  ‘볼 때마다 민트색이 어울리는 상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희랑은 민트색처럼 차가운 사람이기도 했다.’ (p.66)

  희랑은 의식론 연구소에서 파견되어 피실험자인 현을 관찰하는 연구원이다. 상큼하기도, 차갑기도 한 민트색은 희랑이라는 인물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주제인 ‘우리 삶의 양면성’을 말하는 데 쓰인다.       


  “(…) 어차피 평일은 죽느니만 못해요. 숨 쉬는 게 고통이라니까요.”

  ‘그러나 주말을 앞두었다는 그 쾌락은 평일의 고난과 시련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p.85)

  금요일은 현에게 있어 스쿠터와 마찬가지로 ‘해방’을 가져다주는 요일이다. 현은 금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이 고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쾌락’과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라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의 가치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고통과 함께 금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을 잃어버리자 현의 삶엔 권태와 혼란만이 남았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빠지고 만 것이다.     


  [존재의 정의]

  ‘김현은 의식이 없던 지난 몇 주 동안 가장 훌륭한 업무 성과를 보였다. 그의 말대로, 차라리 아무 의식도 없는 편이 나았던 걸까?’ (p.85)

  희랑의 물음에 이 작품의 궁극적인 질문이 담겨 있다. 자아 없는 기계로 사느냐, 대부분 고통스러운 인생을 영위하느냐. 글쎄, 결국 나 자신의 삶과 존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본다. 기계에게 필요한 건 잡음 없이 프로그래밍된 업무를 완벽히 해내는 것이므로 현과 같이 스스로를 무인 발급기로 취급한다면 자아 없는 기계로 사는 것이 걸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꺼이 환희와 고통이 공존하는 삶에 뛰어들기를 택한다면, 비로소 희랑의 말에 부정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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