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lin Mar 29. 2023

꽃봉오리가 아름답게 느껴질 때

일상


 대학 글쓰기 수업 때, 교수님은 자신의 하루를 글로 표현해야 하는 과제를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 있었다, 점수를 받기 전까지는. 나는 글쓰기가 어렵다는 사람이 이해가 안 가는 콧대 높은 대학생이었다. 글의 깊이와 감각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는데 단 한 글자도 못 쓰겠다는 동기들의 말이 당최 이해가 안 갔다. 나에게 글은 그냥 쓰면 되는 거였다. 물론 남들이 봤을 때 엉망진창인 글이 더 많았고, 꽤 잘 썼다 생각해 볼만한 글도 있다. 잘 쓰든 못 쓰든 그건 둘째치고

우리가 평소 말하는 것의 1/10 만이라도 적으면, 글쓰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처럼 말이 많은 사람은 적을 것도 많아져 글쓰기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다)


 아무튼 내게 주어진 혹평은 이랬다. "글이 지나치게 무겁습니다. "


 처음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럼 휙 쓴 가벼운 글이 좋다는 건가, 본인 과제를 대충 내길 바랐나?

나름 노력을 들여 쓴 글이 부담 덩어리가 되었다니 마음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게다가 나는 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나는 옛 글을 좋아했다. 특히 시집 콜렉터였다. 중앙 도서관에 가서 수많은 책 중, 겨우 빌릴 시집 한 두 권을 발굴하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친구와 카페에 앉아 이야기하다가 휴지 위에 문정희의 비망록을 외우기 위해 적고 있는 나를 본 친구는 당황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시에 진심이었으니까. 시를 좋아하면 사람이라면 시 한 편 정도는 외워야 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문정희의 비망록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각자의 책 취향을 말해 보자. 어째서인지 색감이 알록달록한 표지를 딱 펼치면 하얀 건 종이요, 새까만 글이 적혀있는 책은 손이 안 갔다. 지금은 책 편식을 고치려 디자인에 큰 비중을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에 내가 좋아했던 건 제목만 툭 얹어놓은 표지에 세월의 손 떼가 탄 누리끼리한 질감의 종이를 선호했다. 이런 책을 붙들고 있으면 괜히 오래된 세월에 올라탄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결론은 글을 어른스럽게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멋있어 보이는 문장이라면 내 것처럼 사용해서 썼을 게 눈에 훤하다. 대학생이 되면 나름 본인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하나 돌이켜 보면 아직 어린 나이다.

교수님이 주신 부담스럽다는 혹평은 왠지 어른의 표현을 도둑질한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세월을 가 본 적도 없으면서 어린애가 세월 다 산 사람들의 표현을 훔쳐서 썼으니 얼마나 웃기고 어이없는 글이었을까.


 

지난주 엄마와 밤 산책을 하면서 도란도란 얘기했다. 서늘하게 바람이 부는 저녁은 걷기만 해도 좋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시골에 놓여졌다. 시골살이의 장점은 어쩔 수 없이 자연과 친해지게 된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로 옆 언덕 다리 하나가 있다. 그 다리 중간에 자칭 부러진 것을 고쳐놓은 이가 노약자들을 위한 의자를 만들어 놨다. 주황빛 가로등 밑에 놓인 의자는 그 글 덕분에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사이 턱 하니 놓여있는 걸음이 느린 사람들을 위한 의자가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가로등 밑의 턱 하니 놓인 의자 하나가 운치 있게 느껴졌다.

완벽한 배경과 소품이라고 생각했다. 감상에 젖다가 고개를 돌려 엄마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도로의 먼지 때문에.


 아, 우리 모녀는 취향이 참 다른 것 같다.



 며칠 전, 응봉산을 오르며 길가에 올망졸망 핀 꽃봉오리를 보고 설레는 엄마가 생각났다.


 "사실 나, 그때 꽃봉오리 보고 설렌다는 엄마 볼 때 신기했다.

왜냐면 나는 꽃봉오리를 봐도 별 감흥이 없었거든. 꽃은 활짝 필 때가 제일 예쁘잖아?"


 "응, 엄마도 그랬어. 근데 이 나이가 되니까 막 피어나려고 하는 준비하는 그 모습이 예뻐.

  너도 꽃봉오리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면 알게 될 거야."


  "그러려나, 내가 엄마 나이가 되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와의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문득 그 교수님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 교수님은 나에게 서툴고 미성숙한 꽃봉오리의 모습을 바랐을 것이다. 다 핀 꽃 같은 글은 이제와 보니 쓸 수도 없고, 기대조차 안 하셨을 것이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서툴고 삐뚤빼뚤한 글을 미사여구 없이 솔직하게 썼다면 어떤 답변을 받았을까.

 서툰 것을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을 고백한다.

 그리고 솔직함이 제일 쉬웠던 나이에서 솔직한 글을 쓰지 못했던 아쉬움을 남겨 본다.


작가의 이전글 모네의 꽃밭에서 길을 잃어보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