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대학 글쓰기 수업 때, 교수님은 자신의 하루를 글로 표현해야 하는 과제를 주셨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 있었다, 점수를 받기 전까지는. 나는 글쓰기가 어렵다는 사람이 이해가 안 가는 콧대 높은 대학생이었다. 글의 깊이와 감각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는데 단 한 글자도 못 쓰겠다는 동기들의 말이 당최 이해가 안 갔다. 나에게 글은 그냥 쓰면 되는 거였다. 물론 남들이 봤을 때 엉망진창인 글이 더 많았고, 꽤 잘 썼다 생각해 볼만한 글도 있다. 잘 쓰든 못 쓰든 그건 둘째치고
우리가 평소 말하는 것의 1/10 만이라도 적으면, 글쓰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처럼 말이 많은 사람은 적을 것도 많아져 글쓰기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다)
아무튼 내게 주어진 혹평은 이랬다. "글이 지나치게 무겁습니다. "
처음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럼 휙 쓴 가벼운 글이 좋다는 건가, 본인 과제를 대충 내길 바랐나?
나름 노력을 들여 쓴 글이 부담 덩어리가 되었다니 마음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게다가 나는 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나는 옛 글을 좋아했다. 특히 시집 콜렉터였다. 중앙 도서관에 가서 수많은 책 중, 겨우 빌릴 시집 한 두 권을 발굴하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친구와 카페에 앉아 이야기하다가 휴지 위에 문정희의 비망록을 외우기 위해 적고 있는 나를 본 친구는 당황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시에 진심이었으니까. 시를 좋아하면 사람이라면 시 한 편 정도는 외워야 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문정희의 비망록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각자의 책 취향을 말해 보자. 어째서인지 색감이 알록달록한 표지를 딱 펼치면 하얀 건 종이요, 새까만 글이 적혀있는 책은 손이 안 갔다. 지금은 책 편식을 고치려 디자인에 큰 비중을 두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에 내가 좋아했던 건 제목만 툭 얹어놓은 표지에 세월의 손 떼가 탄 누리끼리한 질감의 종이를 선호했다. 이런 책을 붙들고 있으면 괜히 오래된 세월에 올라탄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결론은 글을 어른스럽게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멋있어 보이는 문장이라면 내 것처럼 사용해서 썼을 게 눈에 훤하다. 대학생이 되면 나름 본인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하나 돌이켜 보면 아직 어린 나이다.
교수님이 주신 부담스럽다는 혹평은 왠지 어른의 표현을 도둑질한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세월을 가 본 적도 없으면서 어린애가 세월 다 산 사람들의 표현을 훔쳐서 썼으니 얼마나 웃기고 어이없는 글이었을까.
지난주 엄마와 밤 산책을 하면서 도란도란 얘기했다. 서늘하게 바람이 부는 저녁은 걷기만 해도 좋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시골에 놓여졌다. 시골살이의 장점은 어쩔 수 없이 자연과 친해지게 된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로 옆 언덕 다리 하나가 있다. 그 다리 중간에 자칭 부러진 것을 고쳐놓은 이가 노약자들을 위한 의자를 만들어 놨다. 주황빛 가로등 밑에 놓인 의자는 그 글 덕분에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사이 턱 하니 놓여있는 걸음이 느린 사람들을 위한 의자가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가로등 밑의 턱 하니 놓인 의자 하나가 운치 있게 느껴졌다.
완벽한 배경과 소품이라고 생각했다. 감상에 젖다가 고개를 돌려 엄마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도로의 먼지 때문에.
아, 우리 모녀는 취향이 참 다른 것 같다.
며칠 전, 응봉산을 오르며 길가에 올망졸망 핀 꽃봉오리를 보고 설레는 엄마가 생각났다.
"사실 나, 그때 꽃봉오리 보고 설렌다는 엄마 볼 때 신기했다.
왜냐면 나는 꽃봉오리를 봐도 별 감흥이 없었거든. 꽃은 활짝 필 때가 제일 예쁘잖아?"
"응, 엄마도 그랬어. 근데 이 나이가 되니까 막 피어나려고 하는 준비하는 그 모습이 예뻐.
너도 꽃봉오리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면 알게 될 거야."
"그러려나, 내가 엄마 나이가 되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와의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문득 그 교수님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 교수님은 나에게 서툴고 미성숙한 꽃봉오리의 모습을 바랐을 것이다. 다 핀 꽃 같은 글은 이제와 보니 쓸 수도 없고, 기대조차 안 하셨을 것이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서툴고 삐뚤빼뚤한 글을 미사여구 없이 솔직하게 썼다면 어떤 답변을 받았을까.
서툰 것을 창피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을 고백한다.
그리고 솔직함이 제일 쉬웠던 나이에서 솔직한 글을 쓰지 못했던 아쉬움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