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황의 시절에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맹랑했던 중학생, 어린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왜 나를 맞춰야 하냐며 급기야 등교 거부권을 내밀었다. 학년 부장 선생님은 자칭 동부의 하버드라는 우리 중학교를 자랑스럽게 여기셨지만, 하늘 아래 문제아 한 명 없는 학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낙관주의자 어머니는 "네가 사춘기는 짧고 굵게 겪어서 다행이야" 라며 말씀하지만, 가끔 그때의 이야기를 무기로 꺼내실 때마다 뜨끔하여 이야기의 주제를 바꿔버린다. 인생이란 뭘까. 나름 머리가 컸다고 자아를 찾으러 훌쩍 떠나고 싶지만 그 돈마저 부모님 지갑에서 받아내야 하는 서글픈 나이였다. '중2병'이라는 병명이 돌 만큼 자신이 가진 서툰 논리와 표현은 과히 무적이라고 할 만하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가 다 틀리진 않았다. 지금은 그 시절의 맹랑함이 부럽기까지 하니까.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며 꿈을 향해 달린 끝에 임용고시에 합격한 중학교 초임 국어 교사.
짐작건대 우리 반 학생들을 만나고 자신이 꿈꿨던 아름다운 교직의 현장은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라고 본다.
학급 뒤에는 위인 같은 롤모델을 붙여 놓는 칸이 있었는데, 급기야 학생 몇 명이 선생님과 닮은 동물을 그려 걸어 놓는 행위에 기가 막혔을 것이다. 카리스마를 장착한 기술 가정 선생님께서는 너희 때문에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우셨다며 수업 시간에 각각 편지 한 장씩 쓰라고 할 정도면 반 분위기는 말 다 했다.
나는 마음도 몸도 아픈 중학생이었다. 학교에 입학한 후 어렸을 때부터 앓았던 아토피가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밤에 지독하게 긁고 나면 진물이 흘러나왔고, 교복 셔츠에 살이 닿아 붙었던 것을 떼어 내면 또다시 진물이 났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니 자연스레 교복을 입는 것이 싫어졌고, 교복을 입지 않으면 벌을 주는 학교가 싫어졌다. 병이 가뜩이나 예민한 내 마음을 잡아먹은 날에는 등교길에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침묵 끝에 자퇴하고 싶다며 고백했다. 엄마는 혼자 세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으니 나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볼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서로가 최선을 다했던 시기였기에 원망할 수는 없다.
어느 날 밤, 아파트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수화기 안에서 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냐는 담임 선생님의 간절한 목소리에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검정고시를 보겠다며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었다 고작 지금의 내 나이에서 몇 살 더한 정도니까. 좀처럼 하나로 모이지 않는 학생들 때문에 선생님의 교직 생활은 낮에도 밤에도 계속됐을 것이다. 요즘 입을 모아 외치는 워라벨이 웬 말이었을까, 퇴근해서도 선생님의 역할은 계속됐고 캄캄한 밤하늘이 자신의 마음과 같았으리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그 밤하늘 중심에 선 사고뭉치 중학생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마음을 안고 교실로 향했다. 선생님은 독후감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겠다며 유인물을 나눠주셨다. 며칠 전, 우리에게 숙제로 독후감을 써 오라고 하셨는데 아마 다들 귀찮은 숙제정도로 생각하여 대충 휘갈겨 썼었던 게 분명했다. 유인물 안에는 학생들이 쓴 독후감의 모범 사례를 보여 주시며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상하게 그중 절반이 내 글이었다. 시간에 쫓겨 쓴 글을 잘 쓴 독후감이라고 소개하니 어깨가 올라가고 입이 근질거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잘하는 게 있다는 걸 공식적으로 처음 깨닫게 된 순간은 황홀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는 애였던 것이 익명의 이름으로 인쇄된 글을 굳이 짝꿍에게 내가 쓴 글이라며 속닥거렸다.
나는 그 이후로 선생님이 좋아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향유하는 것들을 알고 싶어진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국어 하나는 손을 놓지 않았고, 국어 선생님 마음에 들려면 문학 소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종종 선생님께 책 추천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그 시절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책 한 권이 생겼다.
선생님은 가끔 울고 싶을 때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를 꺼내어 읽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처음 깨달은 건 어른도 혼자 울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고, 책을 읽고 울었다는 말로 자신을 울린 문제를 뒤로 숨겨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술에 취해 우는 어른, 음악을 들으며 우는 어른들도 있었지만 책을 붙들고 운다는 게 어린 나에게는 무엇보다 고상한 울기 방법 같았다. 그렇게 고등학생을 지나 대학생이 된 내가 울고 싶어질 때면 선생님이 붙들고 울었던 그 책을 붙들고 엉엉 울었다. 롯데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사장님께 호되게 혼난 뒤, 조용히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훔치던 그 때에도 빨간 표지의 그 책을 떠올렸다.
내게는 스승이 있었기에 지나올 수 있는 삶의 구간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귀국 전, 내 몸보다 큰 짐들을 짊어지고 역으로 가야했다. 기숙사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시다가 하필 자동차가 퍼져 수리를 맡겨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보통이면 미안하다는 전화와 메시지를 남길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더운 여름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기어이 짐을 기차역으로 함께 옮겨 주셨다.
하필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함께했던 귀국길이었다. 귀국 당일 기차역 안에 의심되는 테러물이 발견되었고, 무기한으로 봉쇄되어 공항에 가지 못할 뻔했을 때에도 나는 울먹이는 눈으로 목사님이 사 주신 햄버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도 바쁘게 잘 살아내면서 눈으로는 늘 타인의 곤경을 발견했다. 받은 만큼은 주며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도움만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며 알량한 자존심에 소리쳤지만 결국 도움
이 필요한 나는 어렸고 그들은 아직도 우직한 어른이다.
결국 그녀는 나에게 좋은 선생님이었지만 나는 선생님께 그닥 좋은 학생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있어서 힘든 학생이었다. 어쩌면 학교에 오거나 말거나 성가신 나를 4분단 맨 뒷 줄에 제껴두고 그 시선을 다른 학생들에게 돌렸더라면 수고가 덜한 초임 교사의 시기를 보내지 않았을까. 바보같은 제자가 이제서야 과거 선생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그분의 정갈한 글씨체와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매년 스승의 날에는 찾아갈 낯과 명목이 없어 메시지로 조심스레 안부를 전하고 묻는다. 그러면 답장이 되어 돌아오는 따뜻한 포용력에 한없이 안기게 된다. 어린 20대의 초임 교사에서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신선생님을 생각하며 글쓰기의 동력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