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시 눌린 뿌리목

데미안 그 후.

by 휴사


데미안


이름도 위대하여 누구나 알 법한 책을 다 읽고 이제서야 숨을 내둘렀다.

그야말로 오르가즘.

정말 오랜만에 '살아있었다'는 한 마디가 절로 입에서 뛰쳐나왔다.


내 몸에 존재하는 생명의 증거들이 내 육안으로 쉬이 확인될 정도로 나는 전율했다.

가벼운 소설의 무게조차 되지 않을 책 한 권이 나를 또 한 번 뒤틀었다는 사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흔한 책이지만 흔하지 않다 외치는 속 깊은 외침들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내어

초등학교를 건너온 이래

아마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내어 쓴 '독후감'이라 할만한 글을 이제부터 보여드리려 한다.






내 어린 시절. 어딘가에 존재했지만 어느 한 곳이라 특정하기 바쁜 낙원의 기억 속에서 그때 몇 차례나 다른 세계와 충돌했었고

그 시점, 그곳에는 상처받고 억압된 아벨의 형질을 띈 사람이 있었다.

마치 싱클레어와 같은 미완성의 사람이 바로 나였었다.


나에게 있어 데미안은 곧 흘러가주는 시간이었고 모든 것이 안정적인 낙원을 일구게 해주는 것이 꼭

집착의 손아귀에서만 이뤄진다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시간이란 참~어지간하긴 하구나.

이놈 앞에서 풍화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이런 형태로 인정하게 될 줄 며칠 전의 난 몰랐다.


내 과거가 이리도 처절하게 타인의 손을 거쳐 파헤쳐졌다는 감정아래서 내 혈류는 요동쳤고

그와 반대되는 기이한 청량감만이 내 목구멍이 끝나는 부분까지 신물나게 밀고 올라왔다.

내면에서조차 스스로에게 하지 못한 말을 타인의 경험을 통해 토해낸 상황이 비록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이렇게나 시원 찬란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되든 좋았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품을 원하면서도 내심 멀리하게 된 그때부터

끝을 아는 듯이 불어나는 내 성장력과 호기심이 주변의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틀어막혀 결국 뒤틀리고

비틀려버린. 무언가 잘못 길러진 내 자화상이 앞선 기이한 청량감과 함께 머릿속에 내려쳤다.

여기까지 와서도 남 탓을 하고 내 숨을 그치는 한심한 모습이 이 글에서 비쳐졌다.

부끄럽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런 내용의 책 위에서도 코가 시큰해지고 머리가 빙빙 돌 수 있다니!'

이 사실 하나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맞아. 나에게 있어 데미안은 절대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모습부터 바뀌게 하고 다른 세계들도 바뀌게 하는 그 거대한 흐름은 마치 작 중 데미안의 형상처럼

불길하면서도 가슴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절대적인 주체인 시간은 내가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걸 간간히 억누르게 해 주고 변화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내 발버둥을 꽉 짓누르고 이내 모든 것을 잠재워 내 사지를 찢고선

다시 한 땀 한 땀 짜 맞추었다.


변화, 고통, 흐름이 나를 여기까지 당도하게 했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무엇이 되었든 마음에 어떤 대상이 충만하게 될 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진심으로 그것이 필요하다고 체감한다면 어떤 일이건 간에 미리 짜고 치는 트릭처럼 자연스럽게 행하여지게 만들어주는 힘.

그게 의지가 가진 기능이라는 것은 잘 알았지만 날 자유롭게 다루지 못하니 그런 사실을 알아도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기어코 입에서까지 불평불만이

한 차례 쏟아져 나오려고 할 때

어느새 글귀와 페이지를 뚫고 데미안은 여느 때의 그 냉소적인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자신만이 온전히 유지하는 뜻, 생생히 느끼는 가치와 더불어 그것들을 깊게 가지기를 원하는 욕심의 삼박자가 호흡을 맞춘다면 어떤 것이라고 한들 어떻게든 변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한편으로는 그따위 말은 믿고 싶지 않았었지만 나는 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의견이 종종 겪어본 현실임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이렇게 글을 흘리고 있는 것이 그 증거 중에 하나요.

내가 살면서 행해온 모든 일들이 그다음이니.

사실 어떤 지대한 힘이라도 결국 삶을 바꿀 정도의 찬물을 끼얹지 못하였구나.



그런 식으로 자중하니 막스 데미안은 넌지시 내게 말을 건넸다.

응축된 내 어깨를 툭 치곤 "어때"라는 관용표현 하나조차 쓰이지 않은 이 짧지만 얇은 나를 관통하기에 충분한 그 한마디로 하여금 이 자리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꿰뚫었다.


난 조용히 입을 닥쳤고 그럴 필요가 있었다고 느껴 몸의 진동을 낮추었다.



그러기를 한참

내 뇌 속에서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을 각인하려는 사람에겐 단 한 개의 의존을 깨부수는 것 이외엔 아무런 의무도 없다고 생각해.

거기까지 가서야 남게 될 나만의 의무란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일 거다.'


데미안의 차가운 휘파람이자 나의 결론이 스치니 내 마음을 얕은 곳부터 뒤섞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 미래의 모습을 쉬이 유희했었다.

어쩌면 멋있게도 여겨질 만한 여러 모습들로 말이다.


나를 위하여 예비된 그 역할들을 쉽게도 꿈꾸곤 했었지만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타인을 사랑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또 다른 어떤 모습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그 개념들위에 나를 쌓고만 있던 꼴이었으니

왠지 조금 슬퍼졌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는 사실이 동시에 다가왔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란 나에게로 찾아가는 것.


시인 혹은 광인, 예언가 혹은 범죄자로 끝장나건간에

그런 아무래도 좋을 운명 하나만이 아닌 자신 속에서 운명을 찾아내고

그것을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

나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하나의 책무로써 강조될 것임을.

그가 어느새 저 멀리에서 등으로 흘렸다.

고마워 데미안.


지금껏 곧게 뻗었다 생각했던 나의 뿌리목이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한번 지그시 눌러지고 나서야 데미안의 심지가 담긴 이 한마디가

조그만 내 마음 이곳저곳에서 끈질기게 울렸으니 난 이제 죽어도 후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