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윌 헌팅이 되기까지

사람은 하나의 정답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by 휴사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 '굿 윌 헌팅'을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과거의 향수에 잔잔하게 겹쳐지는 영화의 첫 부분에 이어지는 스탭롤을 응시하고 있자니

처음 영화를 보았을 적의 내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꿈도, 병도 없는데도 지금처럼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지' 라며 독백하는 나의 자각과 동시에 화면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작중의 주인공인 윌 헌팅이 '굿' 윌 헌팅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그는 범 지구적으로도 눈에 띄는 지력을 가진 사람인데도 그런 빛나는 재능과 대비되는 암울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자신의 유한한 청춘과 재능을 썩혀가는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는 왜 자신의 특기와는 하등 관계없어 보이는 삶에서 그리 똑똑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고 있던 걸까?


나는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조금은 불편한 사실들을 마주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재능을 부끄러워했으며 동시에 혐오했다. 자신의 자유를 뺏어가는 이 재능을 쓸모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그의 이야기에서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의 아픔이란 게 내 속에서 나지막하게 꿈틀거렸다. 남들이 부여하는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는 가치는 오히려 그의 숨구멍을 죄었을 것이다


그렇게 숨 막히는 일상에서도 그는 타인들과 충실하게 관계를 맺는다.

높은 위치의 교수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위에 서고, 연인을 사귀어도 서로 사랑하는 형태가 아니고, 스승에게도 존경심을 품지 않는. 무언가 잘못된 느낌을 주는 모습임에도 그는 그들과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딱히 유쾌할 것 없는 인연임에도 왜인지 그들에게 동화되어 살아가는 윌 헌팅.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해주는 존재들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아무리 큰 재능이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냐는 개인의 선택에 국한되고 그런 개인의 마음마저 변화시키는 것은 나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타인은 아닐까?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끼치는 그런 그들을, 주변을 응시하려는 태도가 그 어떤 것보다 먼저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똑똑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고 바보여도 느끼는 바는 있을 테니까.

정해진 답이 있는 수학은 그에게는 단조롭기 그지없기에 지력을 앞세워 굴복시켰지만

정해진 답이 없는 사람의 마음에는 형편없는 오답을 뱉어냈고 있었다는 점이 이 서사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요소이자 교훈이 아닐까 곱씹었다.


'똑똑하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외침이 화면 너머로도 생생히 느껴졌다.

아니. 똑똑한 것에 한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는 단순히 한두 가지의 개념으로 간단히 돌파되는 형태가 아니니까 우리는 계속 변화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윌 헌팅도 그런 모습이다. 언제까지고 굳게 문을 닫고 자신의 철학과 소신아래 살아갈 것만 같던 콧대 높은 청년은 초로히 빛나는 경험이라는 선배에게 인생에서 결여되고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배워나가고, 메워나가며 이윽고 변화하였다.

그는 그렇게 이름 앞에 'Good'이 붙어 마지않는 길로 전진해 나갔다.


윌 헌팅은 결국 자신의 마음의 외침을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길을 멋있고도 시원하게 확정시켰다.

그 모습이 비록 혼자서 일궈낸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그가 내심 부러웠다. 그러면서도 그렇게까지 부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모순적인 결론이 나오게 된 데에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살짝 내비쳤기 때문은 아닐까 하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끝없이 자신에게 물어보고 있다.



나는 아직 내 이름 앞에 'good'을 붙이기엔 한참 이르다고 생각한다.

믿을만하지 않고, 똑똑하지도 않으며, 착하지 않고, 어떠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한심한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나는 '굿'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라 느꼈다. 역시 아직은 병에게 지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 여겨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다.

내 수명보다 길게 살아갈 나의 글을 지긋이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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