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한 명만큼 벌어요
나는 강남에서도 부촌인 청담동에 산다. 세입자지만 얼굴에 세입자라고 쓰여있는 건 아니니 회사 사람들도 미혼일 때부터 강남에 살던 내가 부자인 줄 안다. 물론 아니지만 남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건 내 인생이 달라지는 바는 없다.
우리는 6년 차 맞벌이 부부다. 둘의 벌이는 작년 기준 세후 일억 정도 되나 보다(남편의 원천징수는 왜 봐도 잊어버리는 걸까, 남편에게서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부부의 연소득을 합쳐봐야 요즘 잘 나가는 대기업 외벌이 소득 정도 된다. 실상 강남구 소득 하층민일 것이다. 일단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같은 직장인이라도 한 명이 우리 부부 소득만큼 버는 사람들이고, 남편 주위엔 전문직 천지라 나보다 더할 것이다.
가계부를 쓰진 않지만 집 없는 벼락 거지인지라 결혼 이후 항상 아껴 써야 한다는 마음의 압박은 항상 있었다. 아이 보육 문제로 이 동네에 살고 있지만 살면 살수록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스스로 작아졌다. 내 수준에 맞는 동네에 살고 싶었다. 청담동은 아니지만 강남구에서 오래 살아온 터라 내가 살고 싶은 동네에 거주할 수준이 안 된다는 박탈감은 내 30대를 촘촘히 채웠다.
See the bright side.
누구보다 그러고 싶은 건 나 자신이다. 돼야 말이지.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삶은 참 여전히 팍팍하다.
작년 말에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싶어서 한 달 월급과 지출을 엑셀에 꼼꼼히 정리한 적이 있다.
보육비 100만 원
내 카드값 평균 150만 원(주로 가족 식비, 아이 생필품 등)
펀드 자동이체 20만 원
3인 실비 보험 22만 원
아이 특활비 및 학습지 20만 원
관리비 50만 원(전기/가스비 포함)
통신비 13만 원
정수기 관리비
.
.
이 외 자잘한 건 잘 기억 안 나지만 아무튼 월급에서 몇 십만 원 남기면 기적인 수준으로 안 남을 때도 많았다. 남편 지출도 같이 점검했지만 서로 카드값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냐는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삼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알뜰폰으로 바꿨고, 택시비가 올랐다는 기사 링크를 남편에게 열심히 공유하고, 막차 끊긴 이후에 들어와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때려주고 싶었다. 진지하게 침대 옆에서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정신 안 차리냐며 얼굴을 확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영어유치원은 다른 이유로 불발되었지만 내심 안도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엄마에게 양육비 경감을 정중하게 요청해 볼까 고민도 했지만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최근 몇 달간 외식도 음식 배달도 끊었지만 물가 상승 때문인지 카드값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예산 상 생활비 포함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액은 120만 원 정도로 추정되지만 그렇게 2년간 살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슬펐다. 이 동네에서는 당연히 다 가는 영어유치원을 내 능력 부족으로 소중한 아이에게 기회조차 제공할 수 없다는 생각에 초라해졌다. 원래도 걱정 보따리를 한껏 안고 사는 성격이지만 임신했을 때부터 이런 순간이 오는 게 두려웠다. 아이가 하고 싶은 걸 능력이 안 돼서 못 해주는 상황을 5년도 안 돼서 벌써 부딪혀버렸다.
이대로는 계속 이렇게 살겠다는 위기감밖에 안 든다. 절약이 아무리 미덕이라도 옷도 안 사고, 미용실도 안 가는 식으로 사는 삶에는 한계가 온다. 역시 벌이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또 다른 퇴사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