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 Aug 24. 2024

93세 할머니의 팬티

"할머니, 저 정말 할머니 미워했어요."

"네가 그렇게 대놓고 말하니, 내 손녀가 맞나 보다. 사람이 그렇게 안에 담아두는 게 없어야 장수해."


할머니의 대답과는 관계없이 내 장황한 변명은 계속된다.

"할머니, 자그마치 10년이네요. 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 버려서 동생들이랑... 그래요. 우리 삼 남매, 다 같이 거실에서 잘 수밖에 없던...... 

세월이 장장 10년이라고요."


"내가 우리 큰아들네 가족들에게는 할 말이 없어. 너무 미안해. 큰며느리에게 대놓고 말 못 했지만 정말 제일 미안하고, 내 늘그막에 받아줘서 너무 고마워."


이어서 계속 아흔 넘은 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을 수 있는 건, 할머니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여서였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버린 할아버지, 치매 걸려서 그 병시중......  우리 엄마가 응급실에 려갈 정도로 몇 년을 힘들어하고...... 내 엄마가 힘든 걸 본 만큼 할머니가 미웠어요. 그런데...... 이제 이해해요. 제가 결혼해서 그런지, 할머니도...... 힘든 세월을 지내 오신걸요."


"그래. 네 할아비가 너무 미웠어. 나를 끊임없이 깎아내리던 그 사람. 60대에 바람이 나서 논마지기 판 돈마저도, 내연녀인 그년 입에서 '우리 이 돈 가지고 도망가요'라는 말을 내 귀로 들었을 땐 정말 믿을 수가 없었지. 그래... 그랬지만, 나는 나름 그 돈을 뺏어서 자식들에게 나눈다고 나눴는데...... 그래도 정말 '큰 아들네에 몹쓸 짓을 해버렸구나'라고 후회한단다. 계속 후회했어."


 촉촉해지는 할머니 눈가에

나도 덩달아 눈물을 툭툭 쏟는다.


"할머니는요. 당장 내일 몸이 안 좋아도 절대 생명연장 달지 말라고 하시지만요. 저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할머니가 이 나이 드셔서 우리 집에 오시고, 계속 살아가는 이유! 모든 미움을 털어내기 위한 게 아닐까요? 저는 사실 이제는 할머니, 하나도 밉지 않거든요. 다 이해해요. 할머니 삶이 그렇게... 우리 삶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던 이유들.

지금 밖에 새소리도, 귀뚜라미 소리도 너무 이쁘잖아요? 할머니도 과거는 과거로 다 탈탈 털어버리세요."


40여 년 덜 산 손녀 몇 마디로는

해결되지 않을 분위기라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본다. 

"할머니, 수제팬티 기가 막히게 만드신다면서요? 저도 보여주세요."


할머니 에 생기가 돌며 서랍에서 주섬주섬 알록달록한 것들을 꺼내놓는다.

"이 팬티가 제일 좋아. 덧댄 게 적거든. 이거 가져가라."


나는 웃으며 농을 던진다. 진심 섞인.

"머니. 이거 내가 사진 찍어서 동생들 보여주면 다 갖겠다고 난리 날 텐데...... 더 만드세요."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유산을 손에 넣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가 죽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