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이유가 상대라 생각했지만, 나였다는 걸 깨닫다.
1년간 6명과 모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유들로 싸우게 된다면,
누구의 문제일까?
20살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연애를 할 때 상대방을 그저 연애 상대로만 보지 않는다. 항상 잠재적으로 내 인생의 반려자로서 진지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기준 즉, 나만의 기준이 굉장히 엄격하고, 무거워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기준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모두에게나 통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나는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너는 참 착하다.'라는 말을 참 많이 들어와서 그런가. 나의 생각들을 상대방에게 들려주면, 10명 중 8-9명 정도는 좋게 봐줬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 내면을 자세히 뜯어보면, 난 선한 사람이 아닌 선해야 했던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나의 모습을 숨기거나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난 이 경우에 포함되었다. 원인을 생각해 보면, 과거 학창 시절에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발생한 부산물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치이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나는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나의 기준이 곧 선함의 기준이라 판단되어, 나와 다른 생각이나 기준들이 보인다면 선하지 않은 악한 행동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선함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기준에선 설득이라고 말하지만, 변화를 원하지 않는 상대방의 입장에선 그건 강요였다.
나에게 선함이
누군가에겐 악함이 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선함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신이 쌓아온 시간과 경험이 모여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대게 이 라이프스타일에 크게 불만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게 정답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 당시의 나는 이 부분에 대해 포용할 수 있는 여유라는 것이 없었단 것을 알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착해야 했던 사람이었기에, 나의 기준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기준을 받아들이기란 여간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정말 많은 변화를 느꼈고, 지금의 내가 만족스러워 누군가를 만나게 될 때 기대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여유라는 것을 얻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는 것에 끝이 나면 안 된다. 지난 연애를 돌이켜보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시간들을 나와 함께 연애를 한 분들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 끝에 나온 결론이 위에서 말한 '나에게 선함이 누군가에게 악함이 될 수 있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가 되다 보니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지게 되었고, 그동안 나를 옥죄어왔던 착해야만 했던 기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의 선함을 위해 내가 악해질 수 있다.
아무리 내가 선하게 대하더라도, 상대방이 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거기까지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단단하지만 유연한 기차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선로의 방향에 따라 시사각각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물론 선로라는 기준에 맞춰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선로에 맞게 꺾이지 않고, 곡선을 이루며 따라갈 수 있는 그런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선로가 와도 거기에 맞게 유연하게 따라가 보기도 하고 아닐 경우에는 선로를 다른 곳으로 틀 수 있는 나만의 새로운 선로들도 많을 테니.
만약 나와 같은 고민이 있던 분들에게 이번 글이 위로이자 욕심으로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길 바라며, 오늘의 글을 마쳐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