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레 Jun 18. 2023

해가 바뀌고

캠핑카 2차 보수와 건강상의 위기

  해가 바뀌어 2022년이 되었다. 시어머니가 아르헨티나에 가족을 보러 가셔서 4 말까지 집에는 피노와 우리만 있게 됐다. 그동안 나는 레벨이 올라 A2 수업을 듣게 되었고, 기말시험이 6 둘째 주로 확정되어서 시험이 끝나면 바로 시칠리아로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날씨가 풀리자마자  여정을 앞둔 캠핑카의 2 보수에 돌입했다. 피노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가 어려워하는 문제를 확인하고 해결해 주었다.


  많은 사소한 문제들과 몇 가지 굵직한 문제들이 있었다. 지난 여행에서 드러났던 문제들만 해도 한 보따리. 일단 외벽 이곳저곳에 녹이 슨 것과 엔진오일이 새는 문제는 피노가 맡아 주기로 했다. 녹이 슨 부분들을 기계로 갈아낸 다음 다시 도장해야 하는데, 피노가 도구를 다 가지고 있어서 놀랐다. 정말 없는 도구가 없다! 피노는 능숙한 솜씨로 말끔하게 마무리한 후에 심지어 광도 내 주었다. 그저 압도적 감사.

 

왼) 녹이 슨 부분들을 갈아낸 모습 / 오) 말끔하게 재도장한 모습


  우리가 한 자잘한 작업들을 모두 나열할 수는 없지만, 벽 보수가 빠질 리 없다. 놀라울 것도 없이 뒤편 벽도 다 썩어 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확인해 봤던 거 아니냐고 했더니 지난번에는 거기까지 할 시간도 여력도 없어 일부러 뜯어 보지 않았단다. 썩어 있을 게 분명해서. 그렇구나 허허.. 난 또 뒤는 괜찮은 줄 알았지.. 나무 패널과 벽지를 뜯어 보니 역시나 팍삭 썩은 벽이 드러났다.


  창문과 창틀을 다 떼어내고 벽을 파냈다. 다 파냈는데 왼쪽 벽과 이어지는 부분이 축축한 느낌이라 그쪽도 뜯어 보니 역시나 벽 일부와 모서리 기둥이 다 젖어 있었다. 아직 썩진 않았지만 완전히 젖어 있는 이런 기둥은 단단하고 질겨 파내기가 더 힘들다. 손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지만 며칠 동안 매달려 다 파냈다. 그러고 나니 외벽이 낡아 생긴 구멍들이 보였다. 실리콘으로 구멍을 막고 벽을 다시 해 넣었다.

 


  벽으로 쓸 나무판은 창고 문을 재활용했다. 원래 침대 바닥 겸으로 쓰이던 거라 너무 두껍고 무거워 지난 여행 내내 고생했었다. 뭐 하나 꺼내고 넣을 때마다 침대를 들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지난 여행 내내 이 문짝을 떼어내고 싶었었는데, 드디어 떼내어 재활용까지 하니 후련했다.


왼) 실리콘 창틀에 남은 접착제를 긁어내는 나 / 중) 떼어낸 창고문을 재단하는 피노와 남편 / 오) 외벽에 판을 붙여 고정하는 작업


  뒤쪽 벽을 해 넣은 후에는 화장실 바깥벽 타일을 모두 떼어내고 코르크판을 붙였다. 타일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두꺼운 타일이 거실벽과 화장실벽에 붙어 있는 탓에 무게가 상당했던 것이다. 지난 여행 동안 엔진에 무리가 가는 느낌이 있었고, 4월 중에 정기검사를 해야 하는데 그때 차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갈 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굳이 필요없는 화장실 바깥벽의 타일을 다 떼어내기로 한 것이다. 단단히 붙어 있는 타일을 떼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힘들게 떼어내고 나니 단단하게 굳은 접착제가 벽에 남아서 그걸 긁어내는 것이 또 중노동이었다. 하지만 다 끝내고 코르크판과 사진까지 붙이고 나니 역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


왼) 타일과 접착제를 모두 떼어낸 벽 / 중) 완성된 벽 / 오) 벽지가 일어나 떨어진 부분을 손보는 나


  그 다음 작업은, 대망의 화장실이었다. 오래 쓰지 않을 차에 돈을 많이 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분뇨가 차 아래 오수탱크로 모이는 구식 화장실인 탓에 로마의 오토캠핑장에서 거부당해 숙원이 된 화장실 교체! 게다가 검은 물(Acque nere)이라고 하는 이 분뇨오수를 차에서 바로 버리는 시설을 갖춘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도 했고, 오수를 버리기 위해서 차를 매번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도 부담이 되던 차에, 사르데냐에서 주로 무료주차장에서 지내며 화장실 오수탱크를 자주 비우지 못해 냄새로 고생한 것이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변기를 뜯어내고 아래 두꺼운 시멘트벽돌을 힘들게 깨부순 뒤 파이프를 자르고 타일로 완전히 막아 버렸다. 그리고 내용물이 든 칸을 분리해서 들고 가서 버릴 수 있는 신식 변기를 아마존으로 주문했다. 받침을 놓고 새 변기를 놓으니 확실히 업그레이드가 된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변기 사진은 안 올릴게요. 여러분을 위해서:)


  그 외에는 자잘한 보수 작업들이 이어졌고, 남편은 물이 새는 낡은 모터를 새로 주문한 모터로 바꿨다. 이제 매일 소파를 다 들어내고 모터 아래 고인 물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는 이탈리아 남부 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벨크로 접착면이 다 녹아내린 화장실 방충망을 새로 만들어 달았다. 이번에는 자석을 사용해서 탈부착을 하는 방식으로.


  침실 창문의 방충망은 틈 사이로 모기가 다 들어왔던 걸 개선하기 위해서 지퍼가 달린 방충망을 구해서 완전히 벽에 붙여 버렸다. 그 바람에 기존의 탈부착식 창문가리개를 쓸 수 없게 되어 일반 커튼 형식으로 암막커튼도 새로 만들어 달아야 했다. 암막커튼은 중국 사람이 하는 가게에서 할인하는 걸 사 와서 잘라서 쓰고 남은 것은 운전석 뒤에도 달아 알뜰하게 다 썼다.


  지난번에 할인하는 두꺼운 회색 원단을 잔뜩 사서 운전석 뒤 커튼을 만들어 달았었는데, 그게 끝이 말리고 재질과 색이 너무 답답한 느낌이라 바꾸고 싶던 차였다. 파란색 암막 커튼으로 바꾸니 답답한 느낌이 덜해졌다.


  내친 김에 할인하는 예쁜 자투리 천도 몇 장 사다가 운전석 바로 뒤 비는 부분에도 작은 커튼을 새로 만들어 달았고, 너무 얇아 밤에 불을 켜면 안이 비쳐 보이던 화장실 커튼도 두 겹으로 고쳐 달았다. 평생 할 바느질을 1차 리모델링에서 다 한 줄 알았는데, 그만큼 또 더 하게 될 줄이야.

 


  생각보다 일이 많았던 2차 보수를 거치며 정작 위기를 만든 것은 건강 문제였다. 문제는 먼저 16살인 강아지 삐뽀에게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제대로 서는 걸 힘겨워한다 싶더니 그렇게 좋아하던 산책도 거부하고 뭔가 이상했다. 우리는 그날 바로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삐뽀에게는 목디스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약을 먹으면서 통증을 조절하며 계속 누워 있도록 하라고. 삐뽀는 그날 병원에서 돌아온 후 증세가 급격히 나빠지더니 저녁 무렵에는 아예 온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이미 우리에게 연락을 받고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피노는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너무 슬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삐뽀는 평소에 저녁을 먹고 나면 산책 소리만 기다리다 산책이라는 말에 껑충껑충 뛰며 좋아했었는데, 피노가 산책 가자고 불러도 바닥에 널브러진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모습에 우리는 다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캠핑카 보수 작업을 중지하고 내내 삐뽀 옆에 있었다. 옆에 사람이 없으면 일어나려고 낑낑거리며 애쓰는 바람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정도 늘 함께 누워 있으며, 시간 맞춰 밥과 약과 물을 먹이고 정원에 안고 가서 배변을 시켜 주는 동안 다행히 조금씩 증세가 호전되어 갔다. 10kg가 조금 넘는 삐뽀를 안아 나르는 것은 남편이 했는데, 어느 날 무심코 내가 안아들다가 꼬리뼈 부근에 벼락이 치는 듯한 통증에 주저앉고 말았다.


원래는 안기는 걸 싫어하는데 체념한 듯 얌전히 안겨 있는 삐뽀, 다행히 회복하여 좋아하던 산책을 다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캠핑카 보수 작업을 하면서 허리에 무리가 갔는지 불편한 정도의 통증이 계속 있다 없다 했는데, 이번에 뭔가가 완전히 잘못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부활절이라 응급실에 갔는데, 몇 가지 검사 후 추간판 탈출이 시작되는 단계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출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허리디스크라니.. 초기라 다행이었지만 여행을 앞두고 설레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아직 보수 작업도 꽤 남았는데..


  잔뜩 처방받은 진통제를 먹고 다음 날 점심 때쯤 되니 한결 나아져서 기분도 괜찮아졌다. 그런데 오후에 한 번 먹으라는 약을 먹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마약성 진통제였다. 일반 진통제로도 통증이 잡힌 상황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한 것이다. 의사도 약사도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고 오후에 한 번 먹으라고만 했는데. 그 부작용으로 오심에 구토에 두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상태가 나빠졌다. 물만 마셔도 격렬하게 토하는 통에 약도 못 먹고 꼬리뼈 통증도 재발하고 며칠을 더 고생하다 겨우 회복했다.


  그 며칠이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앓아 누운 삐뽀와 나를 돌보느라 남편도 고생을 많이 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이전의 내 일상이 얼마나 평화로웠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지도. 다행히 회복해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지만, 인생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인생,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즐겨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며 우리는 캠핑카 보수를 마무리했다. 이제 칼라브리아, 시칠리아로 떠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날의 코모 호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