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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Jul 29. 2023

칼라브리아 주와의 만남

이탈리아 남부, Calabria

  이탈리아 남부 해안을 말할 때, 우리는 쉽게 나폴리의 아말피 해안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진짜 남부는 부츠 모양의 이탈리아 지도에서 발등과 앞코, 발바닥 앞쪽에 해당하는 칼라브리아 주와 그 앞의 큰 섬인 시칠리아, 그리고 뒷굽과 발목으로 이어지는 풀리아 주다.


  시칠리아는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섬이고, 풀리아 주도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내에서 꽤 인기 있는 휴양지이다. 우리는 지난해에 풀리아 주를 여행했는데 그곳의 절벽과 동굴, 해변과 바다는 정말이지 경이로웠다. 풀리아 주를 이미 여행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칼라브리아 주에 대해서는 기대감이 덜했던 것이 사실인데..

 

  딱 한 곳 기대하는 곳이 있긴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본, 그해 가장 아름다운 해변 랭킹에 오른 아르코마뇨 해변(Spiaggia dell’Arcomagno). 이곳은 워낙 접근이 어려운 비밀스러운 해변이라 캠핑카로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곳을 향해서 해안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저 멀리 해안선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해변과 물빛이 생각보다 아름다워 조금씩 기대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막상 바다로 가려니 대부분의 해안 지역은 캠핑카로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어서 살짝 김이 샜다. 해변으로 가는 길은 기찻길 아래 좁고 낮은 터널을 지나야 하는 곳이 많아 구글맵을 따라가다가 힘들게 차를 돌려 돌아나와야 했던 적도 여러 번.. 결국 예쁜 해변에 가는 건 포기하고 한 한적한 해변의 넓은 무료 주차장을 찾아갔다. 버려진 땅 같은 분위기에 쓰레기가 굴러다니지만 도로변에는 꽃나무가 가득해 진분홍, 연분홍, 흰색의 큼직큼직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황폐하면서도 화사한 곳이었다.

 

  이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 조금만 걸으면 해변이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우리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캠핑카를 몰고 예쁜 해변을 찾아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넓은 유료주차장이 있는 해변을 찾았는데, 마침 시즌이 시작되기 전이라 돈을 받는 사람이 없어서 무료로 주차할 수 있었다.


  해변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늘 하던 대로 유료 해변 옆 무료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유료 해변은 파라솔과 선베드를 빌려야 하는 해변으로, 잘 관리되어 훨씬 깨끗하고 아름답다. 누구나 파라솔을 꽂거나 자리를 깔아도 되는 공공해변을 우리는 그냥 무료 해변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 쓰레기를 거리낌 없이 버리는 편이라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곳이 많다.)

 

  모래사장이 아닌 자갈 해변이고,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눈에 띄는 점만 제외하면 디노 섬이 코앞에 보이고 물이 맑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해변에서 뒤를 돌아보면 끝없이 이어진 산맥과 그 너머에서 파란 하늘로 높이 솟구쳐 부풀어오르는 거대하고 새하얀 구름이 보였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양한 푸른색이 겹겹이 드리워지며 깊어지는 아름다운 바다 위로 디노 섬(Isola Dino)이 불쑥 솟아 있었다.



  햇볕은 뜨겁고 바람은 부드럽고 시원한, 완벽한 날씨였다. 우리는 이곳 해변에서 수영하며 시간을 보내고, 바로 옆 유료 해변의 바에서 차가운 맥주를 사 마시며 해가 지는 것을 보다가 무료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에는 내가 가 보고 싶었던 그 숨겨진 해변에 가 보려고 했다. 이 해변은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부채꼴 모양의 비밀스러운 해변으로, 바다 쪽 절벽이 다리 아래 아치처럼 뚫려 있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을 선사한다. 여기까지 온 이상 꼭 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우리는 캠핑카로는 지나기 어려운 좁은 비포장 길을 힘들게 달려 아르코마뇨 해변 근처 유일한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르코마뇨 해변에 가려면 이곳에 주차를 하고 절벽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 산길을 걷는 방법밖에 없었다. 주차장 입구에는 나이 든 사장님이 앉아 있었고, 우리가 가격을 묻자 5유로라고 했다. 그 정도면 괜찮다 생각한 우리는 5유로임을 다시금 확인하고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르코마뇨 해변 근처 주자창

  어딘가 퉁명스러워 보이는 흑인 직원이 가장 구석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천천히 걸어가는 그를 따라 주차장의 가장 안쪽 구석까지 가서 가리키는 곳에 주차를 한 후 차에서 내려 5유로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고개를 흔들며 10유로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당황한 우리가 입구에서 사장님이 5유로라고 했다고 항의해 봤지만, 남자는 히죽 웃으며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단다.


  뻔뻔한 얼굴로 재차 10유로를 요구하는 그를 보며 아, 이게 이 사람들 수법이구나 싶었다. 할말을 잃은 남편이 나를 쳐다봤다. 이 해변에 꼭 가 보고 싶다고 한 것은 나였으므로. 사실 5유로는 당시 7천 원 정도로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만큼의 큰 돈은 아니었다. 5유로를 더 낼까, 이 해변은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가 볼 기회가 없을 텐데. 마음속에서 깊은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이런 비열한 수법을 너무나 경멸해서, 도저히 그들을 성공시켜 줄 수 없었던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자.”

 

  진심이냐고 확인하는 남편에게 힘주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차에 다시 올랐다. 그냥 가겠다고 하니 직원은 그러라는 말도 없이 등을 홱 돌려 가 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고작 10유로에 꼭 가고 싶었던 해변을 포기하는 것이 속이 쓰렸지만.. 물가가 싼 칼라브리아에서 10유로면 디노 섬이 보이는 해변에서 페달로를 탈 수도 있고, 해변 바에서 차가운 맥주를 다섯 병이나 마실 수 있는 돈이다. 이런 인간들에게 그 돈을 쥐어 주느니 페달로를 타든 맥주를 잔뜩 마시든 하자며, 우리는 곧바로 주차장에서 나와 전날의 해변으로 갔다. 그곳에서 오리배처럼 페달을 굴려 타는 플라스틱 배인 페달로를 빌렸다. 한 시간에 10유로, 디노 섬이 워낙 해변 가까이에 있어서 한 시간이면 섬의 아름다운 동굴 두 곳을 둘러보기에 충분했다.

 

디노 섬과 페달로 / 푸른 동굴에서 물고기들과 수영하는 남편(시즌에는 배가 많이 드나들어 위험할 수 있으니 주의)


  그렇게 둘러본 디노 섬의 동굴들은 정말이지 아름다워서 아르코마뇨 해변에 남은 미련이 씻은 듯이 날아갔다. 해변에서 가까운 사자 동굴(Grotta del Leone)의 바닷물은 영롱한 에메랄드빛, 먼 바다 쪽의 푸른 동굴(Grotta Azzurra)의 바닷물은 카프리 섬의 푸른 동굴처럼 짙은 푸른 색이어서 서로 다른 매력이 있었다. 두 곳 다 물빛이 너무 아름다워 하루 종일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눈부신 햇살과 페달로를 타고 달릴 때 몸을 스치던 선선한 바람의 감촉까지 떠올릴 수 있다. 맑고 푸르기 그지없어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와 수면 아래를 헤엄치는 수많은 물고기들, 동굴 속 그늘에 잠긴 깊고 짙은 물빛까지.


  칼라브리아의 선물은 그게 끝이 아니어서 그날 저녁, 참치샐러드캔을 따서 저녁으로 먹고 쉬고 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색깔이 오묘했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서쪽 하늘에 분홍빛이 번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노을인 것 같아 우리는 바닷가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해변으로 가 보니 옅은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진한 분홍빛으로, 그 아래 바다는 딸기우유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바다 표면이 분홍빛인 동시에 갈치 비늘처럼 은빛으로 매끄럽게 빛나 황홀할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말문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노을은 늘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 기대하지 않았던 때에 찾아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마다 늘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감동을 받고 만다.


  평소에는 볼품없었던 해변을 이토록 아름답게 물들이는 노을 앞에서, 앞으로의 인생도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인 뭔가를 기대하고 좇으며 살아가기 보다는 우연히 마주하는 이런 순간에 놀라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칼라브리아에서 보낼 시간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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